매일신문

[사필귀정] 소녀보다 못한 상극<相剋>의 정치

조선 중기를 풍미했던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은 숙명의 정적(政敵)이었다. 노론의 영수인 우암과 남인의 대표인 미수는 예송(禮訟)으로 낙향과 복직을 거듭하며 평생을 엎치락뒤치락 원한을 쌓아온 관계였다. 그런데 미수가 예송에 패해 삼척부사로 좌천되었을 때 우암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아도 나아질 기미가 없자 우암은 미수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비상을 넣는 처방이 나왔다. 우암은 가족과 제자들의 만류에도 그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고 목숨을 건졌다. 문중과 정파의 사활이 걸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도 정적의 극약 처방을 믿고 따랐던 우암이나, 활인(活人) 처방을 내놓았던 미수나 정녕 도량이 큰 정치인이다.

병자호란 당시 진퇴양난의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척화론과 주화론으로 맞섰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 사람은 항복 문서를 쓰고, 한 사람은 그것을 찢어버릴 만큼 첨예하게 대립했다. 명분과 실리의 삶과 길이 엇갈리던 두 사람은 후일 심양의 감옥에서 만나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한다. 방법이 달랐을 뿐 모두가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대선에서 패배한 상원의원이 반대당 소속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이 언론에 공개되곤 한다. 국리민복을 위해서는 여야를 초월해 한목소리를 내는 선진 정치의 모습이다. 상대와 정적에 대한 눈곱만큼의 배려나 이해조차 던져버린 오늘 우리 정치판의 현주소는 어떤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툭하면 망국(亡國)의 전형이라 매도하던 조선의 당쟁(黨爭)도 지금같이 타락하지 않았다. '은자의 나라 조선'을 펴낸 윌리엄 그리피스가 "반역과 패륜이 난무한 서구와 일본의 정치사에 비하면 조선의 당쟁은 그래도 나름의 도덕성과 게임의 법칙이 있었다"고 한 평가를 새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오늘의 막가파식 정쟁은 멀쩡한 국민까지 끌어들이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의 모습이 그 적나라한 현장이다. 소통과 화합의 상징이어야 할 공간이 단절과 대립의 벼랑이 되고 말았다. '단식 투쟁'과 '폭식 농성'이 같은 시공간에 대치한 가운데 막말과 삿대질을 주고받으며 증오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를 중재하고 아울러야 할 정치는 실종되고, 이를 바라보는 민심은 한숨에 젖는다. 진영논리와 당파적 이해에만 갇힌 정치의 부재가 국회무용론과 국회해산론으로 비화하고 있는 판국이다.

세월호에 발목이 잡힌 정국은 총체적 무기력증에 빠져 제 몸조차 추스르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국가 개조를 위한 동력으로 삼자던 당초의 각오는 허공에 떴고, 진상 규명의 다짐도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는 대통령과 여당의 정치력도 문제이지만, 야당 정치인의 소인배적 행태는 실망을 넘어 역겹다. 서로 헐뜯고 흔드는 와중에 당 대표 격인 여성 의원이 뛰쳐나갔다가 돌아오는 등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명색이 대통령 후보였던 인사의 처신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들이 우암과 미수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처방을 주고받았을까, 이들이 김상헌과 최명길의 처지였다면 어떤 언행을 남겼을까.

모두가 제 목소리만 높이며 남의 얘기에는 귀를 닫고 있다. 나라가 위기인데, 정치권은 개점휴업이니 대한민국호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리와 광장에는 최소한의 양식과 예의마저 내팽개친 야만이 난무하고 있는데도 이를 나무랄 수 있는 어른 한 사람 없다는 말인가. 도대체 모두가 억울하고 성난 목소리뿐인 우리 사회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조선의 당쟁보다 못한 상극의 정치와 민중의 분열은 공멸을 낳을 따름이다.

지난 15일 프랑스에서 열린 LPGA 시즌 마지막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여자골프계의 베테랑인 40세의 캐리 웹(호주)을 따돌리고 18번 홀 역전승을 거둔 김효주는 경기에 전념하느라 자신이 이긴 줄도 몰랐다고 한다. 그녀의 우승 비결은 바로 '생각 없이 치는 골프'라고 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고 무리하지 않을 때 좋은 샷이 나온다는 것이다. 허심(虛心)과 무위(無爲)의 경지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우리의 딸. 어찌하여 작금의 정치와 사회가 열아홉 소녀의 심지에도 미치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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