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2014년 10월, 홍콩과 한국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1990년대 홍콩의 '왕가위 영화'는 대단했다. '중경삼림' '타락천사' '해피 투게더' 등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와 슬로 모션으로 멋지고 차별화되는 영상미학을 구현했다. 게다가 왕가위 감독은 자기파괴적인 젊은이들의 허무한 사랑을 통해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 뜨겁되 서투른 청춘, 강렬하되 절제된 감정, 어그러짐이 빚어내는 쓸쓸함 등. 예술이 인간의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면 왕가위는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 줄 알았던 예술가이자 영화감독이다.

왕가위의 영화에 대해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의 세기말적 정서를 표현했다는 평가가 빠지지 않았다. 당시 홍콩은 영국의 조차지였지만, 본국인 중국에 귀속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자유경제체제로 번영한 홍콩이 사회주의체제의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다. 그의 영화에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날드 가게가 자주 등장했는데 이는 홍콩 사람들의 두려움을 역설적이고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왕가위 역시 철저한 홍콩인으로 영화를 통해 홍콩인들과 혼란스러운 내면을 공유했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17년, 홍콩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중국 중앙정부가 2017년에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후보를 사실상 친중국 후보로만 제한하기로 한 데 대해 반발하는 시위였다. 시민단체 회원들과 동맹 휴업을 선언한 대학생, 일부 중고교 학생들이 가세한 시위대는 지난달 29일 새벽 '센트럴을 점령하라'(Occupy Central)는 구호에 따라 홍콩 금융 중심가인 센트럴과 홍콩 정부 청사 주변 대로를 점거했다. 도시가 출근 대란에 휩싸이는 등 일부 기능이 마비됐지만, 시위대에 물과 음식 등을 건네는 시민이 적지 않았다. 경찰이 최루액을 쏴 해산하려 했으나 시위대는 우산을 펴 이를 막았다.

홍콩 민주화 시위는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정치체제에 대해 급격한 변화를 가하지 않았으나 반환 20주년을 기점으로 친중국화 조치를 예고했다가 역풍을 맞았다. 이식되긴 했지만, 100년도 더 전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훈풍을 쐬어 너무나도 익숙했던 홍콩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는 없었다. 중국 정부가 강력히 대응할 것으로 보여 '우산 혁명'이 성공할지는 불투명하지만, 중국 정부에 큰 고민이 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홍콩뿐만 아니라 경제의 압축 성장과 더불어 중국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일당 정치체제의 미래가 어찌 될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홍콩의 시위를 보면서 우리나라를 돌아보게 된다. 홍콩의 민주주의는 이식된 것이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독재와의 투쟁 끝에 얻은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명박정부에서 빚어진 민간인 불법 사찰,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태에 이어 박근혜정부 들어서도 소극적인 국정원 개혁, 70대 유신 시대의 핵심 참모 기용 등에서 나타나는 퇴행적 기류 등이 그러하다.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거나 장관들의 운신 폭을 좁게 하는 국정 운영 방식도 마찬가지다. 세월호 참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여야의 갈등을 방치하며 한 발짝 물러서 있는 행태도 책임 있는 정부의 자세가 아니다.

박근혜정부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통령은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리고 반대하는 쓴소리, 고언에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다. 소통 부족을 우려하고 소통에 힘쓰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열고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공감 능력과 어려운 국민을 보듬을 수 있는 연민의 정서가 부족한 탓이다.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으면서도 반대자들을 포용하지 못하는 것은 독재자의 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다. 국민 일반과는 다른 사고를 하는 소수의 핵심 참모에 기대는 것은 자신감이 결여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홍콩과 중국의 앞날이 불투명한 것과 달리 대한민국은 전진할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의 현실이 후퇴적 상황에 놓여 있지만,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일시적 진통이라는 어느 학자의 진단에 동의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홍콩처럼 이식된 것이 아니라 고난 끝에 따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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