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늦은 봄날 오후였다. 그날따라 다들 일이 있어 집을 비운 터라 나와 체셔, 앨리샤와 보리가 집 지키기 담당이었다. 그땐 아직 여름이 시작되기 전이었지만, 바깥 볕이 꽤 따가웠기에 난 나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온 집안의 블라인드를 다 내려놓고 다락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 조용한 공간에서, 남은 오수를 마저 즐기려는 양 체셔와 앨리샤도 살포시 다락으로 올라오더니 내가 머무는 책상 앞 난간에 의좋게 자리를 나누어 잡은 채 누워서 꾸벅이며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른한 두 녀석의 모습 때문인지 나도 살짝 졸음이 찾아올 무렵이었다. 고요하던 바깥에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희미하게 들려왔기에 무심코 넘겼지만 누군가가 바깥 데크 위를 걸어다니는 소리와 함께 보리의 낑낑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자고 있던 두 녀석도 동그랗게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고, 나 역시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솔직히 살짝 겁이 나긴 했지만 그래도 바깥엔 보리가 있었기에, 데크 쪽 창으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맥이 탁 풀렸다. 바로 보리가 데크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 조그만 녀석이 무슨 수로 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 앞 고리에 걸어놓았던 목줄을 풀고는 데크 위로 올라왔다가 나무 틈 사이에 줄이 끼여 울고 있었던 것이었다. 잽싸게 나간 나는 보리에게 잔소리를 한껏 늘어놓으며 줄을 빼 주었다. 위험하게 이게 뭐 하는 행동이냐고 아무도 없었으면 어쩔 뻔했느냐며 화를 내며 주의를 주려고 했었지만 그 와중에도 해맑은 보리는 내 무릎 위로 뛰어올라 여기저기 핥아대며 좋아해댔기에, 결국은 '에구 욘석아' 하며 나도 모르게 그냥 웃음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보리의 탈출 시도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보리는 또 한 번의 탈출을 감행했고 이번 역시 실패하지 않았다. 두 번째 탈출했던 날은 하필이면 외할머니가 우리를 대신해 집에 머물며 동물들을 봐주시기로 한 날이었다. 이젠 보리가 제법 덩치가 자랐기 때문일까, 줄을 끊은 보리는 여기저기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리고 할머니께선 그날 밤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보리를 달래서 불러들이느라 몸살이 날 정도로 엄청난 고생을 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보리에겐 전보다 훨씬 튼튼한, 새로운 줄이 생겼다. 사실 이렇게 거의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줄을 달고 지내게 한다는 건, 보리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다. 아마도 줄로 인해 한정적인 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했기에, 한창 호기심이 왕성하고 운동량도 많이 필요한 나이인 보리였던 만큼 어느 순간 답답함을 느끼고 탈출을 시도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보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고양이들이 있는 좁은 집안에서 지내는 것은 더 답답할 테고, 그렇다고 해서 바로 뒤에 산이 있고, 마을 사람들도 지나다니는 집 밖에서 목줄도 없이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매일 아침저녁마다 하는 산책으로 보리의 마음이 조금은 달래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끔 삐치기도 하고 화도 내는 체셔나 앨리샤에 비해, 보리는 늘 해맑고 순수하다. 이제 꽤 덩치도 커서 제법 의젓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름만 불러도, 눈만 마주쳐도 반가워하며 꼬리를 흔드는 녀석을 보면 여지없이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오른다. 이렇게 착하기만 해서 집은 어떻게 지켜줄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이 아닌, 낯선 이의 소리가 들리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게 또 우리 보리이기도 하다. 요즘은 낮에도 아빠가 뛰어놀 수 있도록 줄을 풀어 주기에, 이젠 탈출하는 일 없이 그저 무럭무럭, 그리고 아가씨인 만큼, 예쁘게 잘 자라 줬으면 한다. 체셔와 앨리샤처럼 말이다.
장희정(동물 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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