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진(51) 영덕군수는 20여 년간 보좌관을 하며 군수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가 여태 보았던 영덕은 정치의 프레임을 통해 본 영덕이었다. 초선의 이 군수는 이제 행정의 프레임으로 영덕을 알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하루가 짧다. 비서'보좌관이 참모라면 군수는 리더이다.
'자리가 사람 만든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한 고민도 그에겐 큰 숙제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에게 인생의 멘토를 추천해 주기를 주문하자 그는 주저 없이 아버지 이남석(90) 옹을 꼽았다.
이 군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초등학교 시절 은사인 고 배효길 선생님, 고 김찬우 전 의원. 김광원 전 의원 등 그가 만난 사람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인생의 중심을 가장 확실하게 잡아준 분은 자신의 부친이라고 했다. 말수는 적었지만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방공사의 대가
한국전쟁 이후 전쟁의 상흔으로 전 국토가 벌거숭이가 되다시피 했다. 이때부터 1980년대까지 쭉 이어졌던 것이 사방공사(砂防工事)다. 산지나 강가의 모래나 흙이 바람과 비에 씻겨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잔디나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는 작업이다.
바로 그 현장에 아버지가 있었다. 경북 영덕군 영덕읍 화수리 출생의 이남석 옹은 1956년부터 지난 1983년까지 경상북도 영일사방사업소(현재 포항 위치)에서 사방공무원인 '영림수'로 근무했다. 재직 동안 100여 곳 넘는 곳에서 사방공사의 현장 실무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산이란 산은 대부분 사막에 가까웠다. 이러다 보니 비가 내리면 포항 일대 형산강'청하천'곡강천 등이 범람하고 농경지 침수와 흙탕물로 인한 생활용수 부족, 그리고 건조한 봄철에는 흙먼지가 국토를 뒤덮던 때였다. 이 때문에 땜질식 사방공사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힘들다고 판단한 정부는 1961년 산림법을 제정하고 사방공사를 전국적으로 본격화한 데 이어 1967년 산림청을 발족하고 1973년 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산림녹화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녹화사업은 완전히 성공했고 이 군수의 아버지는 '사방공사의 대가'로 불리며 그 중심에 있었다.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던 그의 사방 작품은 공사 후에 재공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영일면 학전동 현장은 '사방공사 전국시범사업장'으로 지정될 정도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사방공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 전국 사방공무원은 물론 산림청장 대학교수도 와서 보고 질문하고 토론하고 했답니다. 또한 아버지의 사방공사 실력이 이름이 나자 어려운 현장에서는 '이남석'을 찾기 시작했고 1970년대 영일군 흥해읍 금사동 사방공사 현장에서는 아버지가 필요하다며 특별 요청을 해왔고 당시 김수학 도지사가 특별히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장인정신'성실함'독학
아버지는 초등학교 학력이지만 사방사업을 할 때 당시 가장 많이 보던 책인 '조선사방령'을 이해하고 이를 공사현장에 접목시켰다. 또한 3개월이나 6개월에 한 번씩 집에 돌아와서도 사방공사 도면을 펼쳐놓고 이리저리 설계를 하고 복잡한 산식으로 계산하고 기록하는 모습을 이 군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제가 철이 좀 든 후 집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여쭤봤습니다. '아버지 이런 거 어떻게 다 아세요?' 했더니 '독학했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도 아버지의 이런 면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군수는 1980년대 중반 사방공사 현장에서 본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왜 사방공사에서 아버지가 이남석 이름 석 자를 떨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그 당시엔 그 모습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었지만 말이다.
"저의 대학 시절입니다. 아버지는 현장 일을 하시기 때문에 집에 자주 못 오셨지요. 대학등록금을 아버지에게 직접 받기 위해 포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비포장 도로를 4시간 정도 달려 골짜기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경사진 땅에 잔디를 입히는 과정이었죠. 나무판으로 잔디를 다지는데 한 곳을 5, 6회 정도 때리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10회를 넘고 20회를 넘어 30회를 훨씬 넘게 다지시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땀을 식히셨습니다."
특히 군수 선거 과정에서 이 군수는 아버지의 삶에서 배울 점이 얼마니 많은지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된다. 유세 도중 만났던 한 어르신은 당시 이 후보에게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이 후보, 강석호 의원 전 보좌관 이희진이라는 자네 이름 석 자보다는 자네 어르신 성함 '이남석' 석 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네."
◆내적 소통'외적 소통
이 군수는 지금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 군수의 부인은 아이들 공부 때문에 아직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군수는 아버지의 모습을 요즘 더 제대로 알 수 있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것이 내적 소통이다.
"아버지는 지금도 일기를 쓰고 계십니다. 하루를 마감할 때나 아니면 전날 못 쓰면 아침에라도 일어나 꼭 하루를 기록합니다. 이번에 잠시 제가 들춰보니 기본적으로 일기에 나오는 날씨나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그날의 소회를 적기도 하고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의 팬답게 삼성의 스코어와 경기내용도 있었습니다. 교통사고로 귀가 잘 들리지 않고 허리도 좋지 않으시지만 아직까지 건강하신 데에는 일기를 통해 자신과의 내적 소통을 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이 군수는 아버지가 아흔 나이임에도 노인들뿐 아니라 50, 60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즐긴다고 했다. 오랜 기간 공사 현장에서 다진 폭넓은 인간관계의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주위에 사람들이 모인다고 할까. 외적 소통에 있어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다.' 저도 대학교 때 단과대학 학생회장을 한 적이 있지만 아버지에게 들으면서 결국에는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기게 됐습니다."
이 군수는 지난 선거와 군수 취임 이후 아버지 이남석을 넘어 인간 이남석의 족적을 되짚으면서 일과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고 있다.
영덕 김대호 기자 dh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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