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솔방울

가을 하늘이 높은 건 새털구름 때문일까. 구름이 하늘을 들어 올린 것일까. 하늘이 푸르다고 하지만 파랑도 여러 가지 색깔이며 날마다 그 빛깔이 달라진다. 구름의 모양이 둥글게 시시때때로 변하듯이.

초등학교 시절, 초겨울이면 낙엽 진 숲으로 솔방울을 주우러 갔다. 겨울 동안 학교 난방용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이다. 걸망을 메고 산길을 걸으면 소풍 온 듯 즐거웠다. 떡갈나무 숲에서는 청설모들이 도토리를 굴리다가 인기척에 놀라서 까만 눈을 때굴때굴 굴리며 바라보았다. 소나무 밑에는 다른 풀들이 나지 않아서 주워담기가 편했다.

솔방울은 봄엔 초록색이다가 가을이면 갈색으로 바뀐다. 오월에 노란 꽃을 피워 유월이면 열매를 맺는다. 다 자라면 탱자 정도와 감가량의 크기인데 돌기가 돋은 모습이 파인애플 같으며 마르면 화력이 좋다. 우리가 줍는 솔방울들은 작년에 열린 것이 말라서 떨어진 것이다.

솔방울을 찾다 보면 간혹 숲에서 토끼가 튀어나왔다. 우리는 처음엔 깜짝 놀랐다가 하던 일을 팽개치고 토끼몰이에 나섰다. 토끼는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는 짧아서 오르막 달리기엔 적당하지만 내리막에선 설설 긴다. 하지만 그 재바른 놈을 무슨 재주로 잡는담.

학교로 메고 온 솔방울은 교실 마룻장 밑에 저장했다. 교실마다 나무로 만든 마룻장 아래 공간이 있어 다람쥐 도토리 모으듯 재어둘 수 있었다. 마루에는 가로세로 1m가량의 출입구가 있어 거기로 들어가서 솔방울을 넣어두었다. 겨울이면 당번이 양동이를 들고 퍼내 와서 난로에 쏟아 넣었다. 솔방울을 태우면 교실 가득히 노란 송화 꽃향기가 피어올랐다. 푸른 솔잎 향기가 났다.

점심때가 되면 우리는 난롯가에 옹기종기 모여앉아서 솔방울이 활활 타는 난로 위에 양은 도시락을 쌓아놓았다. 밑에 것이 데워지면 위의 도시락과 위치를 바꾸었다. 도시락 반찬은 십중팔구 김치였다. 나도 김치이고 짝꿍도 김치이고 반장도 김치여서 부끄럼 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소나무는 참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 봄에는 송기를 주었다. 소나무가지를 조선낫으로 툭툭 잘라서 두꺼운 겉껍질을 깎아내고 입에 물면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와 육질이 입안에 가득했다. 늘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송기는 요긴한 간식거리였다. 때로는 뒤가 막혀서 고생했지만. 초겨울엔 청솔가지를 잘라서 불을 지폈다. 젖은 소나무가지는 일단 불이 붙으면 화력이 엄청났다. 쌓아서 말리면 연기도 나지 않고 은근히 타올랐다. 밥을 짓거나 군불을 땔 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가끔 어릴 적 고향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솔방울이, 송기가, 청솔가지가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다. 모든 추억은 향기를 지니고 있다. 가고 싶지만 다시 못 올 아련한 그 풍경들이 저녁이내처럼 피어오른다.

김여하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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