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둑에 다소곳하게 피었던 보랏빛 쑥부쟁이꽃이 며칠 전 내린 된서리에 시들어버렸다. 집 앞의 참나무 숲이 조금씩 성글어 가는 것도, 길가 나무들이 단풍 든 잎을 마저 떨어뜨리는 것에도 마음이 쓰이는 것은 성큼 다가온 추위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강아지들 물그릇에 뜨거운 물을 부어 얼음을 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11월부터 슬금슬금 시작된 시골의 겨울은 내년 3월을 꽉 채우고도 떠나기 아쉬워 미적거릴 것이다.
우리가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뒷마당에는 전 주인이 남겨놓고 간 땔감용 나무가 꽤 많이 있었다. 사람 키 높이만큼이나 쌓여 있는 장작더미는 한두 해 정도의 겨울 연료로는 거뜬해 보여 마음이 든든했다. 하지만 난방용으로 설치돼 있는 화목 보일러에 들어가는 나무의 양은 우리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보일러를 한 번 돌리려면 조금 과장해서 손수레 한 대 분량의 나무가 필요했다. 하루에 두 번씩 보일러를 돌린 지 한 달이 지나자 나무는 표시 나게 줄어들었고, 우리가 그만한 양의 나무를 마련하는 일은 어려웠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보일러를 기름용으로 교체하고 난방보조용으로 거실에 화목 난로를 설치했다.
겨울 난방은 귀촌한 사람들이 풀어가야 할 어려운 숙제 중의 하나다. 우리 동네는 집들이 널찍하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추위는 각개전투를 벌이는 군인들처럼 집집마다 개별적으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지난해는 시골에서 맞이하는 첫 겨울이다 보니 추위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거기다 따뜻하게 지내려면 한 달에 기름 두 드럼도 넉넉하지 않다는 말을 들은 탓에 난방비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보일러 온도를 늘 '외출'에 맞춰놓고 침대매트리스를 거실에 내다놓은 뒤 그 위에 전기 매트를 깔고 지냈다. 종일 피워놓은 난로 덕분에 실내가 춥지는 않았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난로에서 나오는 재가 거실 여기저기를 날아다녀 지저분했고, 연통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목초액 냄새는 집안 곳곳에 스며들었다.
점점 줄어드는 나뭇단을 바라보는 일도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남편과 나는 아는 이의 과수원으로 가서 늙은 배나무를 베어오기도 하고, 벌목한 산에 올라가서 자투리 나무를 들고 오기도 했다. 볕 좋은 날이면 나 혼자 손수레를 빌려 산 아래나 길에서 쓸 만한 나무를 주워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길이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국 우리는 통나무를 한 트럭 사는 것으로 땔감 걱정을 뒤로 미룰 수 있었다. 이렇게 겨울을 보낸 뒤 보일러실에 가보았더니 두 드럼 들여놓았던 기름이 두 뼘이나 남아있었다.(온수는 따로 LPG 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를 경험 삼아 우리는 시월 말부터 겨울맞이 준비를 했었다. 한쪽 구석에 밀쳐놓았던 난로를 다시 설치했고, 유리창마다 단열 시트를 꼼꼼하게 발랐다. 쓰고 남았던 통나무도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잘라서 난로에 넣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거의 켜지 않았던 보일러는 실내온도를 21℃ 정도에 맞춰놓고 아침저녁으로 돌리고 있다. 앞으로 바깥기온이 더 내려가면 화목 난로에 나무를 넣을 작정이지만 아직은 거실에 작은 석유난로를 피우는 것으로도 난방이 충분하다. 올해는 침대 매트리스를 거실에 내놓는 대신 안방과 거실만 보일러를 돌릴 생각이다.
'절벽을 기어오른 사람은 더 이상 절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어느 날 문득 절벽 위에 서면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아래에서 차근차근 올라온 사람에게 절벽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작년 겨울의 경험은 올해의 추위나 난방비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었다. 우리 나름의 겨울나기 방법을 찾은 것이다.
준비를 해놓고 나니 추위도 손님처럼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제 곧 마당과 골목, 들판이 얼어붙을 테지만 그 아래로는 때를 기다리는 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춥고 긴 겨울을 견디게 하는 것은 난로 위에 얹어놓은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는 김뿐만이 아니라 겨울 다음에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엄연한 사실일 것이다.
배경애(귀촌 2년 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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