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부터 경찰출입과 기사취재를 하기로 되었다. 우리는 이를 계기로 하여 조선의 민주주의 건설을 위하여 특히 민주경찰 건설을 위하여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진할 것을 성명하는 동시에 신문인과 경찰문제로 과거 5개월간 경찰청의 기사를 취재보도 못한 데 대하여 독자 제위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리는 바이다. 남선경제신문사'민성일보사'부녀일보사'
1947년 8월 12일 자로 대구의 세 개 신문사가 공동으로 낸 알림 기사다. 해방된 지 이태가 지나도록 사회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언론 또한 혼란스러운 세상의 가장자리로 벗어날 수 없음은 당연했다. 신문사가 습격을 당하고 기자들이 수사기관에 잡혀가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급기야 경찰이 기자를 구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침해했다며 한동안 경찰출입과 경찰기사를 쓰지 않다가 다시 취재에 들어가며 이를 독자에게 애써 전하고 있다.
해방이 되자마자 대구에는 여러 종류의 신문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각기 성격이 다른 이들 세 신문이 한목소리를 낸 것이 눈길을 끈다. 1945년 9월에 창간한 민성일보는 중도좌파 신문으로 분류된다. 그 때문인지 테러와 공장 파괴, 기자 구금 등의 수난을 많이 겪었다. 병의원 광고가 많은 데서 보듯 후원자와 독자 중에는 의사들이 상당했다. 지면에 북조선 소식란을 두는 등 민족적 진보색채도 뚜렷했다.
부녀일보는 이름 그대로 조선 어머니의 등불을 지향하며 해방 이듬해인 7월에 나온 신문이다. 여기자 모집을 위해 따로 광고를 낼 정도로 여성계몽에도 열의를 보였다. 당시의 편집국장 최석채는 영남일보 방수복 기자 구타사건 보도로 구속됐다 풀려났다. 그 후 매일신문 편집국장과 주필을 맡아 자유당 정권의 막무가내식 정치를 비판하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그 일로 또 구속됐고 신문사는 대낮에 테러를 당했다.
남선경제신문은 1946년 3월에 창간되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경제지로 출발했다. 지면에 '시장물가란'을 만들 정도로 서민생활과 밀착된 보도를 시도했다. 창간사에서부터 경제생활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말하자면 민생의 중요성을 꿰뚫었던 것이다. 남선경제신문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대구매일신문으로 제호를 바꾼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천주교 대구대목구 유지재단이 신문을 발행한다. 바로 지금의 매일신문이다.
내년이면 69주년을 맞는 매일신문이 또 한 번 옷을 갈아입는다. 새해부터 석간신문에서 조간신문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셜미디어 시대에 맞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하루에 종이신문을 읽는 시간이 20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최근의 조사는 이런 현실을 뒷받침한다. 기사나 광고시장의 흐름도 아침신문에 맞춰진 지 오래다. 다른 지역의 부산일보나 경남신문 등이 아침신문으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아침신문으로 바뀐다고 신문의 활로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을 터. 가뜩이나 위축된 시장에서 한정된 파이를 두고 벌이는 경쟁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 쉼 없이 밑바탕을 살찌우는 일이 중요하다. 당장은 힘들고 성가시더라도 밑바탕의 비중을 늘리는데 소홀하면 공든탑도 금세 무너질 수 있다. 신문의 기본이자 밑바탕은 누가 뭐래도 독자다.
독자에게 믿음을 보이고 그 신뢰로 구슬을 꿰는 일. 다양한 변신의 몸부림 중에 첫손가락이어야 한다. 그야말로 신문다움을 지키는 길이고 버티는 힘이다. 뉴욕타임스의 아돌프 옥스는 "어떤 신문이 성범죄를 보도하면 추문이지만 뉴욕타임스가 보도하면 사회학적 연구거리가 된다"고 했다. 이러면 어떨까. "어떤 신문이 뒷말을 보도하면 입방아지만 매일신문이 보도하면 콘텐츠가 된다." 매일신문은 대구경북의 좋은 아침을 열 것인가.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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