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서대문 형무소는 차가운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의병을 가두기 위해 일제가 서대문 형무소를 지은 이래 첫 번째 사형이 집행되는 날이었다. 포승에 묶인 허위는 형형한 눈빛과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형장을 향해 걸어갔다. 행여 난동이라도 부릴까 봐 양쪽에 선 일본 헌병들이 자신의 양팔을 붙들자 허위는 가벼운 몸부림으로 헌병들의 팔을 떨쳐냈다. 저 앞에 교수대가 눈에 들어왔지만 허위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명성황후 사해에 김천서 첫 거병
의병대장 허위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왕산 허위는 친필로 글을 남겼다. 유묵엔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는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고 씌어 있었다. 비록 자신은 세상을 떠나지만 조국의 처지가 이러하매, 너희 형제들은 내 뜻을 따라 조국독립투쟁에 매진하라는 당부였다. 그의 당부대로 허위의 형제와 자손들은 한결같이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다"라며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친 허위의 삶을 추모했다.
왕산 허위 선생은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재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공부했고, 충효사상과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한 애국애족 정신을 키우며 자랐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왕산은 조직을 꾸리기 시작해 이듬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충북 진천까지 진출하며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찌감치 의병을 일으키다
무장투쟁 후 광무황제에 의해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역임했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각종 근대적 개혁조치를 추진하던 그는 '을사늑약'과 '정미 7조약'이 체결되자 1907년 경기도 북부지역을 근거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다른 의병부대와 함께 그의 부대는 일제 군경을 공격하고, 친일매국분자를 소탕했다.
왕산은 의병대장 이인영과 함께 전국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총집결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집결한 군사들을 중심으로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편성했다. 48개 부대 1만여 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의병부대였다.
왕산과 이인영이 이끄는 이 부대는 그해 말부터 서울 탈환작전에 돌입했다. 두 달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탈환작전에서 허위는 300여 명의 군사로 선봉에 섰으며 1908년 1월 말에는 서울 동대문 밖 10리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선봉대는 본대와 합류하기 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진공 작전이 좌절된 후 왕산은 임진강과 한탄강을 무대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관공서를 습격했으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강경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왕산이 이끄는 의병이 곳곳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자 친일파가 장악한 조정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경남관찰사직을 제시하며 회유했다. 왕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내부대신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왕산은 거부하고, 최후까지 투쟁할 것을 천명했다.
◆전국 의병 단결과 항전 호소
1908년 4월, 허위는 전국의 의병부대에 거국적인 항전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5월에는 서울로 사람을 보내 고종의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등 30개 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전달했다. 그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무장투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집요하게 허위 선생을 추적해온 일본 경찰에 의해 6월 11일 양평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뒤 선생은 심문과 회유를 동시에 받았다.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는 무력투쟁을 반성하면 일본 신민으로 예우해서 살도록 해주겠다고 했지만 선생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또 일제법정에서 재판장이 "의병봉기를 주도한 자는 누구이고, 대장은 누구인가?"라고 묻자 왕산 선생은 "의병봉기를 주도한 자는 이등박문이고, 대장은 나다"고 답했다. 재판장이 "어째서 통감각하를 들먹이느냐?"고 하자 선생은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니 의병봉기를 주도한 자는 이등박문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라고 되쏘았다. 왕산은 1908년 9월 18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10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나이 54세 때였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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