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는 대구경북에서 조금 멀리 가볼까 한다. 바로 설악산이다. 남한에서는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대청봉 1,708m)이지만 가파르고 험한 정도로 따지면, 한라산, 지리산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험한 악산이다. 높은 데다 험하고, 자연폭포, 암벽, 종주 산행코스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예전부터 계절에 관계없이 산악훈련팀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설악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이가 긴 자연폭포인 토왕성폭포(약 320m)를 가진 산이기도 하다. 토왕성폭포를 비롯해 빙벽등반이 이뤄지는 폭포는 대승폭포, 형제폭포, 50m폭포, 100m폭포, 건폭 등 그 숫자만큼이나 난이도도 천차만별이다. 겨울이 되면 전국의 각 산악회, 대학 산악부들이 동계훈련을 위해 설악을 찾는다.
대학산악부, 초보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폭포는 바로 천불동 계곡을 따라 토막골에 있는 형제폭포, 잦은 바위골에 있는 50m폭포, 100m폭포 정도다. 이곳은 비선대산장이나 양폭산장에 베이스캠프를 꾸려놓고 당일로 등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난이도가 비교적 낮아서 신참 교육생을 데리고 훈련 온 팀들이 자세를 교육하고 등반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필자도 학생 시절 비선대에 캠프를 꾸리고 형제폭포를 겨울마다 등반했었다. 선대 산장은 그런 대학산악부, 일반산악회 팀들로 항상 북적북적했다.
필자는 대학 시절 형제폭포에서 아찔하고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고학년으로 선등을 서서 등반하면서 온종일 80m폭포 중간쯤 40m 지점에 스크루를 설치하고 훈련을 했다. 그러다 오후 3시쯤 장비를 챙겨 철수하려는데 바위에 확보용 볼트가 설치된 80m 지점으로 선등을 시작했다. 스크루를 5개 가져가서 세 개를 사용하며 등반했고, 세 번째 스크루를 설치한 후 수직 부분을 통과했다. 마지막 스크루에서 수직으로 15m 정도 등반을 하고는 10m쯤 위에 앵커가 보였다. 여기서 스크루를 하나 설치하고 등반을 하면 적당해 보여서 2개 남은 스크루 중 하나를 꺼냈다. 그런데 얼음에 사각사각 들어가야 할 스크루가 아무리 돌려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전에 사용하면서 바위에 긁혀 끝이 무뎌져서 얼음을 뚫지 못하게 망가져 버린 것이었다. 짜증도 났지만 누구를 탓하겠는가? 다음부터 잘 챙겨야지 하면서 나머지 스크루 하나를 꺼내 다시 얼음에 돌려 넣었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 남은 스크루마저도 망가져 있는 것이다.
스크루 없이 더 올라가려니 위쪽 얼음이 너무 얇아서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어설프게 5~10m 더 올라가다가 혹시나 추락할 경우는 40~50m 추락을 감수해야 한다. 그 정도 추락을 했을 때 내 몸이 무사할지 자신이 없었다. 벌써 15m를 올랐고, 다시 내려가기에는 어려운 수직 구간이고, 해도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어서 자신이 없었다. 지금 그냥 추락해도 앵커까지 15m, 앵커에서 내가 추락한 로프 길이가 15m, 로프 유격 2m. 더하면 어림잡아도 30m 이상의 추락거리가 나왔다.
3분쯤 생각에 잠겼다. 올라갈까, 아니면 추락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은 흐르고 날은 어두워져 갔다. 쌀쌀한 바람까지 불기 시작했다. 결정을 해야 했다. 손에 든 바일을 한참 쳐다봤다. '이게 하강할 때까지 내 체중을 견뎌 줄까?' 1분 정도 곰곰이 생각하다가 최대한 깊고 안전하게 바일을 얼음에 박아 넣었다. 그 후 그 자루 부분에 카라비너(등반할 때 사용하는 D모양의 링)를 설치한 후 내 생명줄인 로프를 통과시킨 후 아래를 보며 외쳤다.
"하강!" 마지막에 설치한 스크루에 도착할 때까지 내가 박아 넣은 바일이 버텨주어야 안전하게 하강할 수 있다. 빠지면 그냥 뛰어내린 것보다 더 긴 거리를 추락해야 한다. 계산해 보기도 싫었지만 60m를 거의 다 추락해야 할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 바일 한 자루를 꼭 쥐고 천천히 로프에 몸을 실었다. 사락사락하는 소리를 내며 극도의 긴장감과 어둠 속에서 하강을 시작했다. 내가 빙벽에 박아 넣은 낫자루 같은 바일 하나에 내 목숨이 달려있었다. 하강하는 동안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말로만 들어봤는데 정말로 그랬다.
드디어 발아래 내가 설치한 스크루의 모서리에서 반짝이는 은빛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몇십 년 동안 헤어졌던 가족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기쁠까. 항상 무심하게 사용하던 장비였는데 정겹고 예뻐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조심스럽고 재빠르게 스크루에 달려 있는 끈을 낚아챘다. 드디어 살았다.
그 스크루에 로프를 바꿔서 설치한 후 하강을 했다. 장비를 챙겨 비선대로 돌아가는 길이 매우 기쁘고 즐거웠다. 마치 새 삶을 얻은 것처럼. 내일 벽에 붙어 있는 바일과 스크루를 회수하러 가야 할 걱정은 걱정도 아니었다. 내 숨이 붙어 있고, 내 두 다리가 멀쩡하기 때문이다. 비선대에 도착해서 먼저 내려온 다른 대원들이 준비해 준 저녁을 같이 먹고서야 안전하게 내려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재민(대구산악연맹 일반등산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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