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고종 독살설

1919년 1월 21일 오전 6시 고종황제가 침전인 덕수궁 함녕전에서 붕어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 사실을 바로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고종이 사망한 지 일주일이나 지난 1월 27일에야 "이태왕이 돌아가셨으므로 오늘부터 3일간 가무음곡을 중지한다"는 칙령을 발표했다.

67세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의문투성이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왕조실록은 고종이 1월 20일 병세가 깊어져 1월 21일 묘시에 승하했다고 기록했다. 고종이 오랫동안 지병이라도 앓아온 것처럼 묘사했지만 어떤 병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후 독살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고종의 인산일(3월 3일)을 앞두고 크게 떠돌아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됐다. 당시 발행된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는 고종이 한일합방을 거부해 독살당했다고 썼다. 독살설은 고종이 궁녀가 들고 온 식혜를 마시고 숨졌고, 이후 두 명의 궁녀도 의문사했다는 내용이다. 우연일지 모르나 고종이 생을 마감하던 날 당직사령은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자작 칭호를 얻은 이기용과 이완용이었다.

독살설에 힘을 보탠 것은 친일파로 낙인된 윤치호의 일기다. 그는 사돈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근거로 1920년 10월 13일 자 일기에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 돼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1, 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 이를 벗기기 위해서 바지를 찢어야 했다, 이가 모두 빠져 입속에 있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 30㎝가량의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고종 승하 후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는 등의 5가지 독살 근거를 적었다. 윤치호는 사돈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는 순간 고종의 독살을 확신했다고 한다.

고종 독살설은 아직 정설이 아니다. 여러 기록과 윤치호의 일기 내용 등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는 있지만 아무런 공식적인 움직임은 없다.

일제가 고종을 자연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이유는 많았다. 일제는 고종에게 을사늑약이 합법적이었다는 것을 문서로 작성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고종은 끝내 사인을 하지 않았다. 고종은 여차하면 해외로 망명, 조선 독립운동에 힘을 보탤 수도 있었다.

고종 독살설은 충분히 파헤쳐볼 가치가 있다. 이것이 그냥 설에 머물지 않도록 제대로 규명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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