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차 리얼 뮤지션' 이승환이 대중문화계 전반에 폭넓게 '기압골'을 형성하며 새삼 주목받고 있다. 크고 작은 공연은 연일 매진사례, 지난달 21일 구정 연휴 기간 SBS에서 방송된 공연실황 중계 '진짜'도 95%에 달하는 광고 판매율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심야시간에 전파를 탄 공연실황중계에 이 정도로 광고가 붙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그 외에도 주로 아이돌 가수들이 판을 치는 Mnet 음악순위프로그램 '엠카운트다운'에 초대돼 스페셜 무대를 펼치는 등 각 방송사 음악 관련 프로그램 섭외 1순위로 꼽히며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또 2월 열린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음악인상을 거머쥐는가 하면 SBS 심야 뉴스 시간에 '특급 인터뷰이'로 출연하기도 했다. 실력은 인정받으면서도 그에 부합하는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해 아쉬움을 남기던 시간이 있었던 것도 사실. 지금 서서히 커지고 있는 '이승환 기압골'의 영향력은 성에 차지 않아 안타까웠던 그 시절의 기억마저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
◆'히든싱어', 고사하던 프로그램이 재조명 계기 마련해줘
지난해 말 방송된 JTBC '히든싱어 3'는 '이승환 붐'의 계기가 된 프로그램이다. 이 방송 이후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는 발표된 지 8년 만에 음악순위 프로그램 차트 상위권에 재진입했고, 소리바다 10월 5주 차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음원 사이트까지 휩쓸며 가요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이승환은 모창능력자와의 대결(방청석의 일반인 평가단이 목소리만 듣고 진짜 이승환을 맞히는 게임)에서 패했다. '원조 가수'로서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 상황. 하지만, 이승환은 밝게 웃으며 '쿨'한 모습을 보여 더 큰 환호를 끌어냈다. 그리고 20대의 열정과 외모를 가진 50대 베테랑 뮤지션의 패기 넘치는 라이브는 잠시 쉬고 있던 팬들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들었다. 또한, 아이돌 가수에 열광하던 1020세대까지 이승환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사실 지난해 이승환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새롭게 발표한 앨범 'FALL TO FLY 前'이 뛰어난 완성도로 호평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매번 내놓는 곡마다, 그리고 새로운 공연을 열 때마다 '최고'라는 평가를 끌어내면서도 '대중과는 멀어지는 듯하다'는 말을 들었던, 안타까웠던 시간의 연장이었다.
이런 상황에 예능 프로그램 제작진의 섭외가 들어왔으니 이승환이 선뜻 출연을 결정할 리가 없다. 특히나 일반인 모창능력자와 함께 앞뒤가 꽉 막힌 통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진짜 이승환 찾기 게임'에 응해야 한다니 황당했을 법도 하다.
그래서, '히든싱어' 제작진은 끊임없이 이승환의 주위를 떠돌며 끈질긴 설득작업을 해야만 했다. '뮤지션에 대한 리스펙트'를 기본으로 한다며 프로그램의 취지를 수도 없이 설명했고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주겠다고 강조했다. 결국엔 '라이브가 아니면 노래하지 않겠다'는 이승환을 위해 프로그램 사상 처음으로 세트를 개조하면서까지 무대 위에 밴드를 올려 MR(녹음된 반주) 대신 '100% 라이브 무대'를 꾸렸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승패를 떠나 이승환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실력을 보여줬고, 프로그램은 감동과 재미를 주며 화제가 됐다. 동시에 이승환 본인마저도 "고마워요, 히든싱어"를 외치고 다닐 정도로 '이승환 붐'이 무섭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력파 뮤지션의 존재를 '히든싱어'가 다시 부각시켜 준 셈이다.
◆이제야 알려진 고집불통 뮤지션의 진심
이승환은 뛰어난 실력과 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됐던 뮤지션이다. 발라드로 인기를 얻어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꼽혔다가 차츰 록의 색깔이 진해지는 과정에서 '음악의 깊이를 택하며 대중성을 포기했다'고 인식됐다. 음역대를 넘나들며 리듬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데도 독특한 창법 때문에 가창력에 있어 2, 3순위로 밀리곤 했다. 또 국내 대중가수들의 콘서트 문화를 바꾼 '선구자'임에도 이를 차용해 유사한 공연을 펼치는 가수들에 가려져 아쉬움을 남기는 일이 많았다. 우후죽순 들어선 맛집 속에서 '원조'가 묻혀버린 형국이었다.
물론, 폭넓게 형성된 이승환의 팬들과 음악 전문가들이 그를 알리기 위해 애썼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를 한번에 끌어올리는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환이 '공연은 이래야한다'고 주장할 때, 전문가들도 알아채기 힘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기울이며 서슴없이 돈을 투자해 음악의 완성도를 높일 때, 일각에서는 '갈수록 고집불통이 되어가는 것 같다'며 혀를 차는 이들이 늘어났다. 실력에 비해 홍보 능력이 좋아 '최고'의 자리로 올라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승환은 좋은 음악을 만들어놓고도 홍보를 못해 손해를 봤다. 그런데도 이승환은 홍보에 관심이 없었다. "홍보도 중요하지만 그 비용이 음악과 공연에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주의였다.
실력으로 인정받는 뮤지션이라 조금만 자세를 낮추고 방송사 PD와 언론사 기자들을 만나고 다녔더라면 더 화려한 인생을 살 수도 있었을 터. 그런데도 이 고집불통 뮤지션은 하고 싶은 '음악'에만 충실했을 뿐 '그 외'의 일에는 무신경했다. 1997년 정규 5집 수록곡 '애원'의 뮤직비디오에서 정체 모를 귀신 형상이 발견돼 '마녀사냥'을 당한 후 (당시 상당수 언론은 이승환이 홍보를 위해 귀신의 모습을 뮤직비디오에 넣어두고 모른 척한다는 식으로 매도했다) 언론과의 관계에 있어 오랫동안 '삐딱선'을 타기도 했다. '오직 라이브'만 고집하며 방송에도 자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기획사 인력을 총동원해 홍보에 집중하는 타 가수들의 인기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의 '이승환 붐'은 더 큰 의미가 있다. 오랜 시간 기울인 노력의 결과를 뒤늦게나마 인정받게 됐다는 것이며 그동안 만들어둔 음악과 공연의 우수성을 새롭게 평가받을 기회를 만났기 때문이다. 과장된 홍보에 의해 실제보다 부풀려진 게 아니라 오롯이 실력만으로 정면승부를 펼쳤기에 한결 떳떳하다.
고백건대, 필자는 이승환의 골수팬이다. 1집 '텅빈 마음' '기다린 날도 지워진 날도'를 시작으로 2집 '너를 향한 마음'을 수도 없이 따라부르다 한때 거의 흡사한 목소리를 낼 지경에 이르렀을 만큼 열성적이었다. '천일동안' 이후 '붉은 낙타' '루머' '나의 영웅' 등 록 음악을 시도할 때도 거부감 없이 그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무대 위에서 4시간을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며 완벽에 가까운 가창을 하던 그는 '8090 키드'들에게 있어 '영웅'과 같은 존재였다.
이후 언론사에 들어가 지금의 필명과 다른 이름으로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이승환과 몇 차례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팬 미팅에 가까운 인터뷰를 하다 불쑥 이승환으로부터 "기자한테 이런 얘기 한 적이 없는데 언제 술 한잔 하자"는 말을 듣기에 이르렀다. 그때 필자는 선뜻 "좋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기자라는 이유로 언젠가 이 고집불통 뮤지션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열심히 한 우물 파며 사는 '철없는 음악인'에게 '때 묻은, 혹은 잘난 척하며 사는 사회인'이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짝사랑의 대상으로부터 고백을 들어놓고 뒤돌아 줄행랑치는 어설픈 10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가까워졌더라면 분명 이승환에게 어쭙잖은 충고를 했을 터. "앨범 투자비용의 20%만 홍보에 쓰자"고. 그래도 이승환은 지지리도 말을 안 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 말을 듣고 수그러들었다면 그건 이승환이 아니다.
정달해(대중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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