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진중권의 새론새평] 두 개의 식민지 근성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1963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남한이 미국 식민지라는 북한의 주장

내 눈에는 시대착오적 '식민지 근성'

리퍼트에 석고대죄 초현실주의 작태

반대편에도 존재하는 '식민지 근성'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에 대한 김기종의 폭력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는 개인의 일탈로 보인다. 그가 이 일이 있기 전에도 여러 번 폭력적 난동을 부린 바 있고, 평소 극단적 언행으로 인해 운동권 내에서도 고립을 당한 상태였고, 최근 월세조차 내지 못할 만큼 형편이 어려웠다는 점 등이 그것을 말해 준다. 한마디로 그의 행동은 존재의 극한에 몰린 한 개인이 연출한 사적 종말론의 집행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범행에 정치적 동기가 깔려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당당해지는 한 가지 방법은 그 범죄를 숭고한 '대의'로 포장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일제하 독립투사들과 같은 '열사'라 믿을 것이며 자신의 행위가 민족해방, 한반도 평화와 남북한 통일을 위한 '거사'라 생각할 것이다. 이 황당한 생각의 바탕에는 우리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이상한 현실인식이 깔려 있다. 바로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라는 인식이다.

북한에서 느닷없이 김기종을 안중근에 비유하며 그의 행위를 옹호하고 나선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물론 남한은 정치, 경제, 외교, 군사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한미관계가 아직 평등하지 않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한을 미제의 식민지라 불러야 한다면, 우리 못지않게 미국의 영향을 받는 독일이나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도 미국의 식민지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 상의 그 누구도 이 나라들을 '식민지'라 부르지 않는다.

김기종은 세계 10위권 규모의 경제를 가진 IT 강국을 느닷없이 정부조차 없었던 일제강점기의 조선에 비유한다. 이 시대착오는 북한의 것이기도 하다. 북한은 국가라기보다는 항일'항미 빨치산 운동을 하는 전투조직에 가깝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미국에 맞서 싸우는 존재('자주성')라는 알량한 자부심 하나로 체제에 대한 인민의 불만을 억누르는 식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인식은 북한체제를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허위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 역시 '식민지 근성'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에 억압 받았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상황과 조건이 완전히 다른 오늘날까지도 그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외상(trauma)에 사로잡혀 강박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자동기계'(automaton). 그 기계의 눈에는 김기종의 범행이 안중근의 거사와 똑같아 보일 수 있다. 김기종 자신도 리퍼트 대사를 공격하며 친일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하던 전명운, 장인환 열사의 거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식민지 근성'은 그 반대편에도 존재한다. 리퍼트 대사가 피습당하자, 애견인 대사에게 개고기를 선사하고, 길거리에서 부채춤과 난타공연을 벌이고, 멍석 깔고 대사에게 석고대죄를 올리는, 차마 눈뜨고 봐주기 어려운 일련의 초현실주의적 사태들이 발생했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와 청나라에 속국 취급을 받던 시대에도 없었던 일이다. 이 꼴을 보며 북한에서는 아마 무릎을 치지 않았을까? '거 봐라. 내 말이 맞잖아. 남한은 미제의 식민지라니까. 그것도 뼛속까지.'

보수우익의 심리 기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외상을 극복하지 못해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한국전쟁 당시의 행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남한이 우월한 경제력으로 북한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국방비를 써가며 세계 몇 위권의 최첨단 강군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군이 떠나면 언제라도 적화될 수 있던 시절의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그들의 과잉 반응은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는 끝'이라는 극단적 불안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이 두 기계 인간들의 두 가지 식민지 근성이 각각 '과잉' 자주성과 '과소' 자주성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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