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몹쓸 사회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편에게 아내가 바가지를 긁는다.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술을 권하나?" 남편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사회가 내게 술을 권한다. 지위 다툼질에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밤낮으로 서로 헐뜯는 사회가 내게 술을 먹인다." 아내가 다시 물었다. "술 안 먹는다고 흉장이 막히나?" 남편은 아내의 무지가 답답하다며 황황히 집을 뛰쳐나가고 만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소설가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개략적인 내용이다.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왔으나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주인공에게 당시는 술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회였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멀어져가는 남편의 구두 발짝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중얼거린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사회가 술을 권하기는 지금이나 90여 년 전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기뻐서 한잔, 슬퍼서 다시 한잔, 화나서 또 한잔. 애주가로서는 그보다 좋은 핑곗거리가 없겠다.

요즘에는 '사회'가 다른 무언가를 권한다. 위험하기로는 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바야흐로 요즘은 '빚 권하는' 사회다. TV를 켜면 대부업 광고가 넘쳐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빌려줄 테니 어서 돈을 빌려가라고 재촉한다. 반복적인 광고 카피와 CM송은 거의 공해 수준이다. 집을 나서면 엘리베이터에서 대출광고 전단과 마주친다. 이번에는 유수의 금융기관들이다. 기존 대출이 있더라도 시가 한도 안에서 담보대출을 해주겠다고 유혹한다.

심지어는 정부조차 대출을 권한다. 금리를 한껏 내렸으니 돈을 많이 빌려서 집을 사라고 은연중에 부추긴다. 한국은행이 콜금리를 1%대로 내린 것은 그만큼 한국 경제가 절박한 상황임을 뜻한다. 불은 계속 지피는데 윗목, 아랫목 할 것 없이 경제는 냉골인 형국이다.

저금리로 풀린 시중자금이 생산 부문에 흘러들어 가지 않고 부동산 시장을 들썩이는 것은 심히 우려스럽다. 우리 경제의 가장 위험 요소를 꼽자면 단연 부채이다. 가계부채 1천조원을 포함해 국가부채, 공공부채를 다 합치면 총 부채가 5천조원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금리를 올리기라도 한다면 빚은 시한폭탄이 되어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옛말에 '남의 돈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고 했다. '몹쓸 사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빚 권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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