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성(82) 연세대 명예교수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오롯이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두만강변에 살다 해방 이듬해 소련군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그는 중공군을 피해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옮겨 다니며 대혼란기를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굴곡의 역사현장에 섰던 소년은 막연히 '별'에 대한 선망을 가졌다. 전쟁, 피란, 납치, 공포 등 어둠 속에서도 늘 반짝이는 별을 통해 밝음과 희망을 갈구했던 것일까.
소년은 피란 중이던 부산에서 중앙관상대 대장이던 이원철 박사에게 천문학도의 길을 묻는 편지를 썼고, 천문학에 가장 근접한 연세대(당시 연희대) 물리기상학과에 응시했다.
당시 국내엔 천문학을 가르칠 전문가가 없던 터라 휴학 중 중앙관상대에서 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미국 유학을 통해 천문학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연세대에서 25년간 후학을 가르치고 퇴임한 뒤에도 경북 예천에 나일성천문관을 세우고 국내 천문학 역사에 골몰하는 등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격동기의 어둠 속에서 별을 탐구했던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 봤다.
◆두만강 지주집안, 소련군 피해 서울로 가다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성진시(현 김책시)에서 자랐다. 일제강점기였지만 주위의 시기와 부러움을 샀다. 소학교 교사를 퇴임한 아버지가 목재사업을 하는 지주이자, 사립여자중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였기 때문이다. 두만강변의 원시림을 채벌해 목재와 펄프공장으로 납품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 돈으로 사립 '실천여학교'도 세웠다. 집안에는 당시 귀했던 오르간이 2대나 있을 정도였다.
8'15 해방은 온 민족의 쾌거였지만, 나 교수 집안은 혼돈의 서막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소련군이 북한에 진입하기 전날 밤 서울로 도망갔다. 지주 집안으로, 자본주의 민족반역자로 처단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3월 성진중 1학년 1학기만 마친 그는 어머니, 동생과 함께 피란 가듯 아버지가 있는 서울로 향했다. 오르간은 물론 집도 처분하지 못한 채였다.
서울에서 겨우 살 곳을 마련해 정착할 무렵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배재중 6학년, 개학한 지 25일 만이었다.
◆관악산과 부산, 뿔뿔이 흩어지다
인민군들은 삽시간에 서울을 점령하고, 지주나 고위관료 등을 붙잡았다. 나 교수의 집은 한강 넘어 대방동. 인민군은 미군이 한강에 시한폭탄을 떨어뜨린 바람에 한동안 도하를 못하다 9월에야 1개 소대가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주요 체포대상자였다. 집안을 뒤지던 인민군은 방바닥과 천장에 총격을 가했으나, 일본식 가옥의 화장실 탱크에 숨은 아버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친구 집에 있던 그는 배가 고파 집에 들렀다가 인민군을 보고 도망쳤지만, 결국 붙잡혔다.
나 교수는 "인민군들이 나와 친구를 인민군 동태를 국군 등에게 전해주는 연락병으로 알고 대방동파출소로 끌고 갔다"며 "그곳이 접선 장소가 아니라 우리 집이라고 했다가 오히려 '반동분자의 아들을 잡았다'고 좋아했다"고 말했다.
결국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자수하고 대신 풀려났다. 그와 친구는 정처 없이 남쪽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1'4후퇴 때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피란 갔다. 북송된 줄 알았던 아버지는 붙잡힌 지 열흘 만에 도망쳐 관악산 밑에 은거했다. 비록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서울 수복 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별 소년, 천문학자가 되다
어릴 때부터 '별'에 관심을 보였던 그는 천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전문가도 없고 마땅한 대학도 없었다. 결국 가장 근접한 연희대 물리기상학과를 택했다. 전쟁 막바지 무렵 부산에서 응시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별 대신 물리학만 공부하다 보니 회의를 느꼈고, 결국 2학년을 마친 뒤 휴학하고 중앙관상대에 들어갔다. 그나마 낮엔 천문과 관련된 일본 책과 영어책으로 홀로 공부하고, 밤에는 관측과에서 별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학위를 따야 대학원에 가서 제대로 천문학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2년 만에 복학했다. 4학년 1학기에는 천문학 1개 강좌가 있었는데, 전문가가 없다 보니 독학으로 별 관측 등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강의를 맡기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너 살 아래의 동료들에게 직접 물리학을 강의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1963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는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했던 터라 충격을 받은 미국이 이공계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던 때였다. 그 덕분에 그는 조교로서 등록금은 물론 월급까지 받아가며 공부할 수 있었고, 8년 만에 박사학위를 땄다.
1974년 연세대 교수가 된 그는 연세대 천문대장을 8년간 맡는 등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며 후학 양성과 별 관측에 열정을 쏟았다.
◆별 노인, 천문학의 역사를 캐다
나 교수는 은퇴(1998년)하기 6년 전 서울 연희동 단독주택 지붕에 3억원짜리 천체망원경을 설치했다. 공전 주기가 27년이나 되는 쌍별을 퇴직 후에도 계속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서울의 밤은 해마다 밝아졌다. 결국 별 관측이 용이한 지역을 찾다 우연한 기회에 예천으로 망원경을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딴 천문관까지 세웠다. 1999년 6월 개관한 나일성천문관에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천문도와 별자리 지도, 동서양의 해시계를 비롯한 고장비 등 별자리 관련 자료 170여 점이 전시돼 있다.
그는 이제 한국 천문학의 역사를 밝혀내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그는 "경북의 유교문화권 연구는 인문학에만 집중돼 있다"며 "임진왜란 때 거북선이나, 세종대왕 당시 천문대와 측우기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 유교문화에 과학과 기술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4년 전 (사)과학문화진흥원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조선 세종시대 천문학자로 천문역법을 개발한 김담의 역서 복원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다. 또 자신이 설립한 예천 나일성천문관을 천문박물관으로 확충하는 작업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별을 왜 관측하느냐는 질문에 거창한 대답 대신 "인간의 본성이자, 욕구"라고 했다.
"별은 서울에서 보나 산속에서 보나, 어제 본 별이나 오늘 본 별이 큰 차이는 없지만, 밝기와 이동 등 현상을 보면 신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병구 기자 kbg@msnet.co.kr
사진 이성근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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