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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의 시와함께] 오서요-한용운(1879~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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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얏어요, 어서 오서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에로 오서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읍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야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겄읍니다.

그러면 좇어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일 수는 없읍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얐읍니다, 어서 오서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서요, 나의 품에는 보드러운 가슴이 있읍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입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러웁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야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서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야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야 있읍니다.

만일 당신을 좇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등시에 무궁입니다.(……)

오서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얐습니다, 어서 오서요.

(부분. 『한용운 시전집』. 문학사상사. 1989)

우리가 기다리는 우리의 미래는 무엇일까? 지금보다 더 나은 시간들이 오리라 우리는 기대하지만, 정작 기다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 시의 '당신'을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쫓겨 우리가 꽃 속에 숨겨 주어야 하고, 우리가 품에 안고 칼과 방패로 지켜주어야 하고, 심지어 우리의 죽음으로써까지 지켜주어야 하는 '당신'. 이 연약한 누군가를 우리는 왜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시인이 기다리는 당신은 영웅이나 국가나 아름다운 정치체가 아니라 우리 옆의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에게 옴으로써 나의 기다리는 '때'가 오는 것이고, 그 '때'가 다시 그들을 호명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제대로 된 삶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라는 이 해후의 동시성이 이 시를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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