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의도 통신] 그 의원의 방

사랑방 같은 국회의원실이 있다. 그 방은 남녀노소, 직위고하 불문이고 직업도 묻지 않는다. '오늘 혹 차 한 잔 시간 되십니까'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몇 시부터 좋다'든지 '오늘은 그렇고 내일 몇 시가 좋다'는 등 발송자보다 적극적이다.

그래서 매일 특정 시간이 되면 기분좋게 그 방으로 간다. 방에 들어서면 손님이 있거나 혹은 뭔가를 열심히 읽고 있다. 방해꾼이 된 느낌이지만 얼굴이 마주치면 큰 환대를 받는 것처럼 여겨진다.

"롱 타임 노 씨!" 어느 날 그는 창 밖을 보며 암기하듯 연설문을 읽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물으니 "조금 있다가 대정부질문합니다"고 했다. '그 틈을 내 시간을 내주셨구나'하는 기자의 마음에 촌각을 다퉈 일을 보게 된다. 자주 보지만 만날 때마다 격의가 있고, 정중하다.

국회의원실마다 책장의 위치가 다 다르다. 그 의원의 방은 더 색다르다. 뭐랄까, '과시'가 없다고 할까, 책장이 텅 비어 있다. 창쪽 책장에는 한 오십 권 될까 말까 한 책들이 꽂혀 있을 뿐이다. 상패와 액자와 파일로 빼곡한 다른 방보다 한결 편안하다.

하루는 의원이 휴대전화를 받는 틈을 타 일어나 책장을 열고 책을 빼 책장을 넘겼다. 무척 놀랐다. 책 밑이 까맸다. 페이지에는 연필, 파란색 볼펜, 빨간 색연필, 노란 형광펜 자국 고랑이 빼곡했다. 그리고 여백마다 그의 고민과 질문이 메모로 박혀 있었다. 산 책, 받은 책, 빌려온 책이 빼곡히 쌓인 그 어떤 방보다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책을 여러 번 읽으시는 편인가 봅니다."

어느 하루, 공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슬쩍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독(五讀)을 기본으로 하지요."

첫 번째는 글을 읽으며 책장만 넘기고, 두 번째는 무슨 색, 세 번째는 무슨 색 이런 식으로 글을 읽는다 했다. 다섯 번째는 수첩에 메모해 가며 읽는다. 진액만 추린 그 수첩의 내용은 체화된다. 새벽녘, 수첩을 들고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며 외우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한댔다. 고민하지 않은 분야는 즉답을 피하고 공부를 한다고도 했다. 따라 하려 해보았으나 습관이 될 때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짐짓 못 본 척 지나치게 되는 의원실이 있다. 뭔가를 물어보면 되물어온다. 지금 정치권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한테서 들으려 한다. 그 방 책장엔 책이 가득하고 책상에도 테이블에도 키를 훌쩍 넘게 쌓여 있다. 그 책들은 가볍고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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