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실버들은 '이제는 늙어버린 육체를 보완해주는 기능적 배려'를 넘어 '여전히 젊은 마음을 채워 줄 무엇'을 필요로 한다. 많은 '무엇' 중에 유난히 각광받는 것이 문학이다.
◇글쓰기 공부하는 실버들
2일 오후 7시. 대구교대 평생교육원의 '자서전 회고록 쓰기반'. 20여 명의 머리 희끗한 사람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에 열중하고 있다. 대부분 60, 70대다. 이 대학 평생교육원 4개월 과정의 '자서전 회고록 쓰기반'에는 이번 학기에만 36명이 등록해 글쓰기를 배운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끝내고 천신만고 끝에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얻은 사람들도 있고, 은퇴 전까지 높은 사회적 직위와 경제적 여유를 누린 사람도 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방송통신대학 과정까지 마친 사람도 있고, 정규 대학까지 일사천리로 마친 사람도 있다.
글쓰기 반 실버들은 이렇게 말한다.
"글쓰기는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다, 사람은 자기 얼굴을 쳐다볼 수 없다. 글쓰기라는 거울을 통해 지난날을 돌아보게 된다. 비록 기억될 만한 업적을 이룬 적도 없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자서전을 쓰면서 스스로 꽤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취는 미약했지만 내 삶의 과정이 선했다는 것을 느꼈다. 젊은 시절의 시행착오를 돌아보게 되었고,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를 스스로 위로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경북은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글쓰기 교실은 편재해 있다. 지도 교수들이나 강사들에 따르면 대학의 문예창작학과를 제외한 나머지 글쓰기 교실 수강생의 90% 이상이 실버들이라고 한다. 실버들로 가득한 문학교실을 두고 한때는 '문학이 늙고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요즘은 '실버=문학'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실버들이 글쓰기를 통해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거듭나는 셈이다.
◇자기치유와 이웃 연민
위 사례처럼 실버들에게 글쓰기는 삶을 돌아보는 과정이자 자기치유, 자아완성의 기회가 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은퇴하고 나이 들면서 친구 사귀기가 힘들었는데, 글쓰기로 자신의 지난날을 보여주자 '우리가 한 시절을 공유한 동지였구나'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린 자식들을 이끌고 셋방을 옮겨 다니던 시절, 자식 걱정으로 잠 못 이룬 날들, 직장에서 쫓겨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날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에 홀로 버려진 듯한 날들을 함께 공유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스스로 위로하고 서로 위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좋은 기억, 즐거웠던 날들은 좀처럼 글감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실버들의 글쓰기 역시 자기자랑이라기보다는 회한과 후회, 고통에 대한 되새김인 경우가 많다. 이런 까닭에 실버들은 글 쓰는 과정을 통해 깨달음을 발견하고, 자기치유의 기회를 얻는다. 문학이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훌륭한 재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실버들이 문학에 심취하는 까닭.
20년 가까이 글쓰기 지도를 해온 장호병 대구문인협회회장은 "과거에는 등단을 목표로 글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성찰, 자아완성을 목표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한다.
그는 나이 든 수강생들을 지도하면서 사람의 무궁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한다. 중고생이나 대학생 등 젊은 층보다 실버들에서 성과와 성취감 모두 높게 나타난다는 말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 강의 초기에는 젊은이들보다 공부 효율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만 지나고 나면 인생의 경험이 묻어나는 생각뿐만 아니라 감성, 순발력, 어휘 모든 부문에서 더 뛰어납니다. 한 세상을 살아왔다는 것만큼 좋은 공부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장 회장은 "글쓰기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흔히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만, 꿰는 기술은 금방 익힐 수 있다. 문제는 언제나 구슬이다. 한세상을 힘겹게 살아온 실버들에게는 오랜 세월의 구슬(경험과 사색)이 있다는 말이었다.
장 회장은 "실버들에게 구슬을 꿰는 기술(글쓰기 지도)을 제공해왔는데, 여기에 구슬을 꿸 자리(실버문학상)까지 제공한다면 실버문학이 봇물처럼 터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버문학은 문단이나 문학에 기여한다기보다는 세대 간 소통과 인간성 회복, 자존감 확보 등 우리 사회 전반을 풍요롭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텃밭시인학교' 김동원 교장(시인)은 실버들이 문학에 심취하는 이유를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들은 글쓰기를 통해 젊은 시절을 추억하고, 인생을 정리해서 책으로 남기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단순히 책을 펴낸다는 행위를 넘어 자기 인생에 대한 인정이며, 위안이라는 말이었다.
김 교장은 "실버들에게는 소년소녀 시절 가졌던 풋풋한 꿈, 그러나 생활이라는 막중한 책임에 눌려 펼치지 못했던 꿈에 도전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막중한 생활의 무게에서 벗어난 지금 진정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자 하는 데,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고 덧붙였다.
◇실버 문학 열풍
최근 5년간 매일신문 신춘문예 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응모자의 1/3 가까이 실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시조와 수필은 물론이고, 동화, 동시 등 어린이의 감성이 필요한 영역까지 거침없이 도전장을 내민다. 깊은 생각뿐만 아니라 강한 지구력이 필요한 단편소설 부문에서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보여준다.
낙타 구멍보다 좁다는 신춘문예지만 당선자도 드물지 않다. 2012년 매일신춘문예 동시부문 당선자 권우상 씨는 당시 칠순이 넘은 나이(1941년생)로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흐른 세월만큼 눈물과 애환도 많았다. 더욱 멋진 동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었지만 신춘문예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해 혼불 문학상에는 77세 할머니가 당선돼 문학청년들의 기를 죽였다. 그런가 하면 201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한 최고령자는 당시 85세로 단편소설 부문에 응모한 '문청'이었다.
문학에 실버 열풍은 매일신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2014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수필 부문 당선자는 85세 할머니였다. 201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자 역시 당시 65세의 실버였다.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는 당시 60세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일본에서는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99세에 첫 시집을 낸 데 이어 2013년 당시 102세의 나이로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같은 결과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제 실버들에게 문학은 생활이 됐다. 대부분 글쓰기 학교 수강생은 60대, 50대, 70대 순으로 많다. 텃밭시인학교 김동원 학교장은 수강생의 90%가 은퇴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세대 간 이웃 간 소통 채널
실버 글쓰기는 세대 간, 이웃 간 소통에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대 간 소통이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실버세대 중에 '나는 젊은 시절을 살아봤다. 이제는 늙어도 봤다. 그러니 내가 더 많이, 정확하게 안다'라는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젊은 세대는 '세월이 달라졌다. 내가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배웠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실버들의 인생이 묻어나는 작품을 선정해 시상하고, 신문지상에 게재하는 것은 세대 간, 이웃 간 소통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인생경험이 배어 있는 실버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삶의 해법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갖가지 사연이 배인 다양한 해법을 통해 사람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젊은 세대는 실버세대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들의 수고에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에는 정답이 아니라 다양한 해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매일신문의 실버문학상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입니다."
글쓰기를 배우는 실버들과 글쓰기를 지도하는 교수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출판사 학이사의 신중현 대표는 "매일신문 실버문학상에 대해 어르신들의 관심이 매우 크다"며 "인생의 깊은맛이 담긴 문학작품을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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