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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창] 경상도 남자를 사랑한 푸른 눈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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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스코틀랜드생. 에든버러대학 법학 전공. 경북대 국제교류센터
1958년 스코틀랜드생. 에든버러대학 법학 전공. 경북대 국제교류센터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은

세상이 온통 빛을 잃은 듯하지만,

한국인과 맺었던 내 결혼이 자랑스럽고

한국인의 아내였다는 영광이

내 가슴에 남아있다

재작년 초겨울에 세상을 떠난 그리운 내 남편, 황대성(데이비드)과 동고동락한 24년간의 소중했던 우리의 결혼 생활을 추억해 본다.

내 남편 데이비드는 김천 사람이었다. 8살 때 부모님을 따라 일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시)부모님이 터전을 잡은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의 초등학교에서는 유일한 아시안 학생이었다. 어린 동양계 소년 데이비드는, 벽안의 이국땅에서 또래문화에 동화되기 위해 어린아이의 유연성으로 불과 몇 년 내에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한국어는 잃어 버리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결혼하였을 때 데이비드는 겉보기에 딱 전형적인 미국인으로 문화적인 차이를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문화적 생각과 표현의 뜻하는 바가 살짝 다른 의미를 담기 시작하였다. 남편의 피부색과 나의 서양적인 눈매를 가진 큰아이 켈란(KELAN)과, 내 하얀 피부와 남편의 한국인 눈을 물려받은 작은아이 메이슨(Mason)을 출산하고서, 비로소 우리의 서로 다른 문화유산과 우리의 상징성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첫아이 KELAN 이름은 한국(KE)과 스코틀랜드(LAN)를 결합하는 뜻으로 한국식으로 켈란이라 이름 지었다.

1997년 경북대학교의 1년 계약직 제의를 받았을 때 일가친척 하나 남아있지 않은 한국에 오기를 무척 두려워했다. 그러나 한국인 아빠를 둔 다섯 살, 세 살배기의 우리 아이들에게 민족문화정체성의 결정적 부분인 한국어를 유년기에 습득하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을 앞세워 한국에 오게 되었고, 두 아이는 이제 한국어와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고 한국과 서양의 두 문화에 편안한 청년으로 장성하였다.

두 아이를 위한 한국에서의 정착이 남편에게 한국인 정체성을 재발견하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3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남편에겐 이미 기억조차 희미한 것이었지만, 남편은 길거리에서 자신과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과 함께 걷는 것에 편안함을 느꼈고, 다른 한국인처럼 칼칼하게 매운 김치찌개를 즐겼다. 나는 남편의 평온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가 한국인의 아내였음을 실감했다. 남편은 삶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이 깊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많은 한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이런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또한 그의 강하고 다분히 다혈질적 성격, 그게 바로 경상도 남자의 기질임도 알게 되었다.

2010년, 남편은 애석하게도 백혈병 진단을 받고 4년 동안 병마와 용기 있게 투병하였다. 인생이 유한한 줄이야 알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다가올 죽음의 공포로 두려움에 떨리면서도 서로 마음속 깊이 의논하고 사랑하면서 이 기간이 우리에게 가장 귀중하였던 것 같다.

남편에게 남은 마지막 치료방법으로 뇌에 위험한 방사능 치료를 결정했을 때 의사들은 남편이 저능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12번의 방사능 시술 후에 마치 영화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하던 남편이 갑자기 의사와 간호사에게 한국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 계시는 100세 된 할머니에게도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쏟아내듯 한국어로 통화하였다. 방사능 치료가 그에게 잠재되었던 유년시절의 추억과 한국말을 회상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주변 모두에게 특별한 여운을 남기고 떠났다. 서양에서는 장례식장에서 간단한 위로의 말만 하고 가지만, 남편의 장례식장에서 문상 오신 분들이 엎드려 이마를 바닥에 닿는 절을 하며 고인과 상주에게 예를 표할 때 한국인의 아내로서 마음 깊이 위로를 받았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으로 세상은 온통 빛을 잃은 듯했지만, 한국인과 맺었던 내 결혼이 자랑스럽고 한국인의 아내였다는 영광이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세계의 창' 칼럼 기고를 마치면서, 내 글을 애독해 준 모든 독자분께 매우 감사하며, 그동안 내가 바라는 느낌과 감정을 잘 살려 글을 옮겨 준 하지형 양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황로은/경북대 국제교류원 원장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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