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관대한 나라, 술을 즐기는 나라.'
대한민국은 술에 관대하다고 많은 언론에서 표현한다. 이러한 방송을 볼 때마다 신임 소방사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2010년 12월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파고들고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길을 걸어다니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12월은 각종 연말 행사 등으로 술과 모임이 많은 시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즌에도 대한민국 소방관들은 항상 시민의 안전을 위해 출동 태세를 확립하고 있었다.
당시 지방소방사로 발령받고 약 2개월의 시간이 지나면서 출동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어느 정도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긴장하던 시절이었다.
야간에 출근하여 각종 행정업무 등을 처리하고 소방관으로서 가장 중요하다는 체력단련을 위해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하고 샤워장에서 온몸에 비누칠을 하던 중 청사 내 화재 출동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출동 벨이 울렸다.
몸이 조건반사처럼 머리보다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샤워를 하던 중이라 순간 당황을 해서였는지 제대로 물로 헹굴 여유도 없어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고 덜 마른 몸에 옷을 입기 위해 옷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늦으면 안 돼, 늦으면 안 돼…'를 속으로 되뇌며 미친 듯이 개인장구함에서 방화복을 갈아입고 차로 달려갔다. 찰나에 심장박동 소리는 내가 들어 봤던 어떤 소리보다 커졌고 신임 소방사인 내게는 1분 1초가 어떤 순간보다 너무 짧았던 시간이었다. 차에 탑승하고 사이렌을 울리면서 안전센터의 차량들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수성1가동의 아파트, 1층 창문에서 연기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출동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되새겨 본다. '아파트 화재 시 들고 가야 할 장비들, 아파트 화재진압세트, 노루발뽑기는 문 개방할 때 써야 하고…' 이런 식으로 혼자 머릿속으로 되새기면서 몸은 공기호흡기 세트를 장착하고 있다. 하지만 신임 소방사인 나는 생각과 몸을 같이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공기호흡기 세트의 어깨끈이 꼬이고 허리끈은 어디 갔는지 찾을 수가 없다. 출동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더욱 당황스러워지고 있었다. 어렵게 장비 착용을 완료하고, 출동지에 도착해 신고가 들어온 아파트 동과 호수를 다시 한 번 출동지령서에서 확인하고 소방차에서 하차해 해당 지점을 확인한다.
해당 아파트 동 입구에 아파트 주민들이 모여 있어서 현장을 찾는 것은 쉬웠다. 화재 현장인 1층 창문 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오고 있었다. 아파트 해당 라인의 도시가스를 차단하고 소방호스를 전개하여 관창수를 따라 건물 내부로 진입하려 하니 문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집 안에 연기는 가득 차 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으며 TV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화재 현장에서 인명이 최우선이라는 말을 선배님들께 여러 번 들은 나였기에 일단 현장에 진입하여 화점을 확인하니 가스레인지 위의 빈 냄비에서 나오는 연기가 온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다. 순간 일단 환기를 시키고 인명검색을 실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방 쪽 창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 한 분이 약주를 드시면서 TV를 보고 계셨다.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창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은 다행히 잊지 않고 창문을 신속하게 열고 할아버지께 밖으로 나가자고 말씀을 드렸다. 할아버지께서는 약주를 많이 드셔서인지 횡설수설하고 계셨다. 처음에는 면체를 써서 말이 전달되지 않나 싶어 면체를 벗고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렸다.
"할아버지, 여기서 일단 나가시죠. 집에 연기가 가득 차 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아, 우리 집에 손님이 왔네~. 나랑 한잔해, 일단 앉아봐~. 한잔하고 같이 나가자"고 하시는데 신임 소방사였던 나는 순간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집 안의 연기 때문에 목이 점점 아파 오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할아버지를 무조건 데리고 나가야겠다는 마음에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아가, 아푸다. 그러면 나갈 테니까 이 술만 다 먹고 나가자" 이러셨지만 억지로 밖으로 모시고 나왔다.
다행히 할아버지의 몸 상태는 이상이 없었고, 아파트 내부 환기 정도로 사건이 마무리되었지만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한 해를 정리하고 마무리 지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12월에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집에서 약주를 한잔 드시면서 이런 일을 당하실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날의 일은 신임 소방사였던 나에게는 샤워장에서 출동까지 당황의 연속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약주 한잔을 보면서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남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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