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핏보면 그는 농투성이다. 방금 일하다 나온 시골농부 같다. 그의 말처럼 그는 가방끈이 짧고 특별하지도 않다. 전라도에 있는 한 농고를 나왔고 장성군의 말단 공무원으로 30년 가까이 근무한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만만치 않은 내공에 놀라게 된다.
그의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은 직접 지은 편백나무 집을 무료로 빌려주면서부터다. 집 이름은 세심원(洗心院). 마음을 씻고 가라며 이름 붙였다. 이곳에서 그는 넉넉한 마음과 베푸는 지혜를 피워내며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여기에 전국의 내로라하는 명사와 고수들이 모여들면서 인문학의 향기까지 더하고 있으니 그의 말처럼 '살롱' 중의 살롱 주인이 된 셈이다.
50대 초반에 은퇴해 방외(方外)거사로 멋지게 살고 있는 변동해(62'전남 장성군 북일면 문암리) 씨. 그를 축령산 해발 350m 자연 속에서 만났다.
-이런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일이면 나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다고 하지만 얻는 것이 오히려 더 많다. 이 집에서 사람도, 세월도, 지혜도 구했다.
-형편이 넉넉한 모양이다.
▶가난해서 대학도 못 간 사람이다. 가시밭길 인생을 살아왔다. 그래도 지금은 어엿한 국비장학생이다.(웃음) 퇴직 후 한 달에 200만원 가까운 연금을 받는다. 시골에서 살기에는 풍족하고 오히려 여유롭기까지 하다. 요즈음 같은 어려운 시기에는 주위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산골에 편백나무 집 지을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나.
▶대한민국의 중년 남성이면 시골에 집 한 채 지어놓고 채마밭 가꾸는 것이 로망이다. 나도 그랬다. 이곳 축령산은 전국에서 편백나무로 유명하다. '히노키'라 불리는 편백나무는 향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피톤치드를 엄청나게 뿜어낸다. 이것으로 집을 지으면 건강에도 좋고 마음에는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직접 지었다고 들었다.
▶1980년대 후반 우연한 기회에 장성군 축령산 자락에 있는 이 땅을 보게 됐다. 순간 전율이 왔다. 앞에 펼쳐진 산 능선에 마음을 쏙 빼앗겼다. 처음에는 잠실이었던 것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움막으로 개조했다. 이쪽을 고쳤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저쪽을 고치고 이런 식으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달렸다. 황토를 깔고 그 위에 숯을 넣은 후 편백나무를 깔았다. 물론 벽에도 황토와 숯을 넣었다. 이렇게 해서 인건비 한 푼 들이지 않고 34평의 본 건물과 12평의 흙집이 완성됐다. 1999년 온전히 내 집이 되었다. 세심원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이 집은 나의 소망과 꿈의 결정체였다.
-어렵게 지은 집을 왜 무료로 개방하게 됐나.
▶멋진 전원주택이 있으니 행복했다. 그 순간, 얼마나 많은 대한민국의 월급쟁이들이 이런 집을 갖고 싶어할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집을 완성한 뒤 곧바로 1백 개의 열쇠를 만들어 백 명에게 선물했다. 언제든지 와서 자고 가라는 생각에서였다. 열쇠가 소문이 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두고 베푸는 삶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이 산속에서 인문학 강좌도 열었으니 이만하면 복 받은 것 아닌가.(그는 장성읍내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세심원'(洗心院)이라고 이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사람들은 얼굴을 열심히 씻으면서 마음은 씻지 않는다. 마음을 닦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사람은 쉬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일만 해왔다. 이곳에서 쉼을 얻고 자신을 한 번 바라봤으면 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을 텐데 그들은 제대로 쉬고 갔는가.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혼자 있지를 못한다.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왕따가 돼 봐야 자신이 보이고 세상이 보인다. 외롭고 고독해야 사람을 사랑할 줄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알게 된다.
-무료이지만 원칙이 있을 듯한데.
▶절대로 유흥을 하러 오는 사람은 거부한다. 술 먹고 화투 치는 장소가 아니다. 쉬면서 마음을 닦는 곳이다. 전화 목소리를 들어보면 감이 온다. 쉼이 얼마나 간절한지, 이곳에서 제대로 즐기며 얻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아내의 불평이 많았겠다.
▶처음 3년은 불평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했는지 즐기는 눈치다. 이곳에 온 손님들에게 밭에서 나온 채소로 된장을 끓이고 나물 무쳐 대접하면 모두들 엄마가 해준 밥상을 받은 것처럼 행복해한다. 밥 두 그릇은 기본이다. 사실 나도 음식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
-음식에 자신이있다는 말인가
▶우리 집의 된장과 간장은 모두 내 손으로 담근다. 웬만한 음식은 다 할 줄 안다. 음식을 할 때 엄마가 하던 모습을 떠올리면 무엇이든지 만들 수 있었다. 거짓말처럼 맛이 손에서 나온다.
-장독대에 장독이 많다. 손님들을 위한 것인가.
▶장독대에 있는 간장 중에는 12년 된 것도 있다. 한국 사람은 된장과 간장만 잘 만들어 먹어도 웬만한 병을 이길 수 있다. 지금 메르스가 창궐한 것도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려면 장독대부터 살려야 한다. 장독대에는 우주의 질서가 있고 우주의 기운이 농축돼 있다. 한국의 힘은 장독대에서 나온다. 정말 장독대 살리기 운동이 절실하다.
-50대 초반에 퇴직했다. 왜 그렇게 일찍 직장을 그만두었나.
▶1999년 세심원이 완성되면서 퇴직을 생각하게 됐다. 2005년 나이 50을 넘기면서 더 이상 직장을 다니고 싶지 않았다. 답답했다. 승진은 되지 않았고 나의 아이디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퇴직을 결심했다. 주변에서는 말렸다.
-어떻게 설득 했나
▶아내는 무조건 내 뜻을 따를 것으로 생각했다. 문제는 아이들이었다. 딸에게 이야기했더니 '결혼할 때까지 다닐 수 없겠느냐'고 했다. 아들은 별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제안했다. 우리 식구 모두가 건강검진을 받고 아무 이상이 없으면 퇴직하는 걸로 하자고 했다. 검사결과 이상이 없었고 그래서 퇴직했다.
-은퇴하고 난 후 오히려 유명해졌다.
▶그렇다. 직장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그러나 퇴직을 하고 보니 나에게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세심원이라는 멋진 '살롱'이 있었다. 또 출퇴근 걱정이 없어지자 온전한 자유가 찾아왔다. 그때부터 산과 나무 꽃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절로 시인이 됐다. 10년 넘게 800명 이상에게 매월 첫날이면, 이곳의 모습을 담은 글을 문자로 보낸다. 아내는 글자 받침도 틀리고 문법도 맞지 않는다고 타박하지만 내 마음을 전달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닌가.
-글 쓰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지금까지 내가 보낸 글을 전부 모으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래 봬도 팬들이 꽤 있다.(웃음) 그런데 글이란 에너지가 느껴져야 하는데 카톡으로 보내면 깊이와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자연에 살며 배운 것이 있다면.
▶기다림이다. 꽃이 피는 순서를 저절로 익히게 됐다. 개나리가 지고 나면 다음 꽃이 기다려졌다. 기다림은 그리움이었고, 그리움은 사랑이었다. 땀의 가치도 알게 됐다. 땀을 흘려야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장을 담을 때도 물과 소금이 서로 이해하고 섞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했다. 장 담그기 한 달쯤 전에 미리 물과 소금을 섞어 서로 알아 가는 시간을 가지니 장맛이 저절로 좋아질 수밖에. 자연이 가르쳐준 것들이다.
-모두들 전원을 꿈꾸지만 막상 전원에 오지 못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것저것 재면 시골로 갈 수가 없다. 영원히 꿈만 꾸다 끝날 수 있다. 무조건 저질러 놓고 봐야 한다. 그림 같은 집을 지어서 가리라는 사람도 전원에 올 수 없다. 처음에는 따개비 같은 집 한 채 짓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해 살아가면서 서서히 고쳐 가면 된다. 그러나 친구를 위한 방 한 칸은 반드시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모이고 심심하지 않다.
-당신에게 '베품' 이란 무엇인가
▶남에게 베풀면 스리쿠션으로 나에게 돌아온다. 베풀면 그것이 남에게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나에게 좋은 기운으로 되돌아왔다. 호텔에서 자고 가는 사람이 호텔주인에게 인사하고 가는 것 봤나? 그러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사람들은 모두 주인을 찾아와 잘 지내다 간다며 인사한다. 이것만 해도 너무 많이 되돌려받은 것 아닌가.
-나누는 것은 집안의 내력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증조부님은 대한매일신보 주간을 지내셨고 낙향해 농민을 위한 균세(均稅)운동을 벌이셨다. 조부님은 광복 후 국회의원을 지내시다 노년에는 고향 장성으로 내려와서 노인들에게 지팡이를 만들어 선물하셨다.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지역민에게 보은해야 한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집안에는 돈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손자 17명 중 대학을 나온 사람은 2명뿐이었다. 가난해도 나누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가훈이 '덕을 쌓고 살아라'다
-세심원과 조금 떨어진 곳에 흙집이 다섯 채 있다.
▶편백나무로 황토 움막을 지어 2009년부터 손님을 맞고 있다. 3일 이상 묵을 수 없고 오는 사람 숫자도 제한한다. 사람이 많으면 제대로 쉴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획은.
▶세심원 근처에 미술관을 만들었으면 한다. 한 사람이 들어가서 감상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미술관이다. 그 위에 산실청을 만들어 멋진 아들'딸을 만들 수 있는 장소와 여건을 제공하고자 한다. 아이디어 한 번 멋지지 않나? 하하하.
글 사진=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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