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주 선비의 길] <2>충절과 절의의 고장

난세… '선비'에 길을 묻다

소수서원에는 영주의 올곧은 선비정신 배우려는 신세대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영주시 제공
소수서원에는 영주의 올곧은 선비정신 배우려는 신세대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영주시 제공
소수서원 전경. 영주시 제공
소수서원 전경. 영주시 제공

최근 사회적 혼란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단어로 '선비'가 급부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주 소수서원에는 선비정신을 배우려는 각계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조선의 유학이 새롭게 주목을 받는 이유다.

영주 선비는 절개와 충정, 학문 수양에 힘썼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국난극복에 앞장서 왔다. 지금도 소수서원은 영주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선비 양성의 요람

영주는 선비문화의 고장이다. 선비는 평소에는 학문 수양에 힘을 쏟으면서도 임금에 대해선 충정과 절의를 지켰고 국가가 위급할 때는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인 양반과는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 선비는 또한 벼슬에는 연연하지 않는 올곧은 인물의 표상이기도 하다.

영주가 왜 선비문화의 고장일까? 영주의 가장 중심에 인재양성의 요람인 소수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이 시작이자 종착지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명하다. 소수서원은 조선의 통치기반이자 선비 사상의 토대인 주자학(조선의 성리학)을 도입한 회헌 안향 선생을 모신 곳이기도 하다.

선비문화는 성리학이 그 시작이었고, 성리학은 영주 사람 안향에서 비롯됐으니 영주가 선비문화의 발상지라고 자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안향이 바로 선비문화의 정신적 지주이기 때문이다.

금창헌 영주시 학예연구사는 "영주는 조선 초 사상가이자 혁명가인 삼봉 정도전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면서 영주 선비가 그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며 "삼봉 선생은 영주는 물론 봉화와 단양 등지의 선비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밝혔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영주는 물론 영남 선비를 길러내는 산실로 자리 잡았고, 그 중심에는 신재 주세붕과 퇴계 이황이 있었다.

주세붕은 풍기군수로 재임 당시(1542년) 숙수사지터(지금의 소수서원 내)에 안향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고, 이듬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이후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해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사액받게 했고, 소수서원에서 직접 제자를 가르쳐 수많은 선비를 배출해 영남 유림이라는 큰 맥을 형성하게 했다.

실제로 영주는 소수서원이 건립된 이후 이산서원 등 20여 곳에 서원을 더 세웠고, 3곳의 향교와 수십 곳의 서당도 건립해 선비의 본고장으로 자리 잡았다. 선조가 성군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퇴계 선생이 왕에게 올린 상소문인 목판본 성학십도 역시 영주 소수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퇴계 선생의 유교사상을 압축한 대표 유물이기도 하다.

금창헌 영주시 학예연구사는 "소수서원 입원록 한 곳만 봐도 1543년 개원 후 340여 년 동안 4천 명 이상의 선비들을 배출했다"며 "영주의 선비들은 고려 말과 조선 초 절의를 지켰고, 벼슬보다는 학문, 충정과 절의, 국난극복이라는 이념을 몸소 실천했다"고 설명했다.

◆충절과 절의

소수서원이 배출한 주요 인물들의 진면목을 알아갈수록 영주의 선비정신을 생생히 읽을 수 있다. 소수서원 이전의 영주 선비들은 절의부터 실천했다. 고려 말과 조선 초 불사이군(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의 절의를 지켜 낙향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이들이 영주 선비의 뿌리다.

영주시내에는 현재 봉송대와 반구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봉송대는 '개성(고려의 수도인 송도)을 받든다'라는 뜻이며 반구정은 '옛날을 돌이켜보다'라는 뜻이다. 모두 충정과 절의가 깃든 뜻이다.

여말의 충신 사복제 권정을 일컫는 말이다. 권정은 공양왕 때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예안 땅에서 은둔했다.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는 마음에 반구정과 봉송대를 짓고 스스로 아호를 사복제(思復齊'고려를 사모하는 올곧은 마음)라 했으니 비분강개가 오죽했겠는가?

태조 이성계가 승지로 불렀고, 태종이 대사간과 대사헌으로 연이어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았다고 해 마을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기사리(棄仕里)라 짓기도 했다고 한다.

예안의 권정이 영주 선비로 칭송받는 이유는 권정의 아들이 영주로 옮겨왔고, 후손들이 봉송대와 반구정을 지금의 자리에 다시 세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정은 안동과 영주 선비 모두로부터 충절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휴게 전희철은 조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무과에 급제해 벼슬이 상장군에 이르렀으나 어린 단종이 즉위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던지고 서른의 나이에 충북 옥천으로 낙향했다. 이후 세조 3년에 가솔을 거느리고 소백산 너머 영주 땅에 숨어들었다.

영주의 사학자들은 휴게 선생이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고, 단종마저 강원도 영월로 귀양가자 영월과 가까운 영주(당시 지명은 영천) 순흥땅으로 왔다고 전하고 있다. 휴게 선생은 영주에 숨어 살면서 돌을 쌓아 대를 만든 뒤 밤마다 관대를 갖추어 단종이 계신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고, 단종이 죽자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삼년복을 입었다고 한다.

◆선비의 학문

영주 선비의 또 다른 면모는 바로 학문이다.

금계 황준량은 풍기가 낳은 석학이다. 퇴계 이황도 제자인 황준량이 먼저 죽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진다"는 기문을 썼고, 퇴계가 지은 '금계행장'에서 금계에 대해 "풍채가 뛰어나 미목이 그림 같고, 재주가 높아 큰 구실을 담당할 만한 재목이었다"고 했다.

금계는 단양군수와 신녕현감 재직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얻었고, 4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말년에 풍기 땅의 금계정사와 금선정에 머무르며 학문을 수양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퇴계가 아낀 제자들 중에는 월천 조목과 간재 이덕홍이 있다. 조목은 소수서원에서 공부를 했고, 과거라는 등용문보다는 평생 고향에서 학문에 정진했고 후학들에게 예법을 가르쳐 선비 중 선비(대유'大儒)로 칭송받았다. 40년 동안 관직을 가졌지만 실제 취임한 기간은 모두 합해 4년 미만이라고 하니 조목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그 위업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덕홍 역시 퇴계가 아들처럼 귀히 여겨 퇴계가 임종 당시 자신의 서책을 맡겼을 만큼 신임했다고 한다. 이덕홍은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거북선과도 관련 있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금창헌 영주시 학예연구사는 "간재 선생은 자신의 문집에 거북선 모형도까지 그렸는데,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제작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문에 뛰어나 기대승과 비견되었고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백담 구봉령, 정유재란 당시 옥중의 이순신을 옹호해 죽음을 면케 한 약포 정탁, 일본에 퇴계학의 진수를 처음 가르친 학봉 김성일,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정치의 구현을 강조한 여헌 장현광, 퇴계 학문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쓴 성재 금난수 등도 소수서원이 배출한 선비들이다.

영주의 선비정신은 정산 김동진으로 집약된다. 정산 선생은 평생을 청렴하게 살면서 후학 양성과 학문 수양에 힘썼다. 특히 구한말에는 국권회복에 헌신한 충절의 표상이기도 했다. 정산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 연관돼 투옥되었어도 관대를 갖추고 학문을 강론해 옥지기들도 선생을 존경했다고 한다. 선생은 구국의 지사이지만 쇠퇴해진 유학을 일으켜 세우는 데 생애를 바친 대학자이자 퇴계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영남학통을 충실히 계승한 거유(巨儒)로 칭송받고 있다.

영주는 현재 선비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영주는 옛 선인들의 고고한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유교와 선비문화를 더욱 빛내고 있다. 영주의 선비문화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야 진정한 선비문화를 알 수 있다.

영주 마경대 기자 kdm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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