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봉화, 영주 등 일부 경북 북부에서는 아버지를 아배라 부른다. 어릴 때 외삼촌과 외숙모가 외할아버지를 아배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 우스꽝스러웠다. 솔직하게는 부끄러웠다. '아배'가 '뭐라카노' '밥무라' 같은 사투리보다 더 촌스럽게 들려서다. 나중에는 조금 딱딱한 느낌의 아버지보다 '아배'가 훨씬 정겹고 따뜻하게 들렸지만, 이미 '아부지'라는 사투리가 익어 실제로 아배라고 부른 적은 없다.
그런데 요즘 이 아배와 비슷한 발음의 이름을 가진 인사가 몇 년째 속을 뒤집어 '아배'라는 낱말까지 싫어졌다. 무시하면 될 테지만 '총리'직에 앉아 있어 쉽지가 않다. 그래서 성(姓)인 아베(安倍) 대신 이름인 신조(晋三)라 쓴다.
광복 이후, 신조 총리처럼 우리에게 비난받은 일본 정치인도 드물 것이다. 비뚠 역사 인식과 표리부동한 언변 때문이다. 이는 올해 '종전 70주년' 담화에서도 잘 드러났다. 주변 국가에 씻지 못할 치욕과 폐해를 끼친 전범국의 총리로서 양심적인 사죄 표현 없이 치졸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는 러일전쟁이 식민지 지배하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며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미화했다. "전쟁 때 수많은 여성의 존엄과 명예가 크게 손상된 과거를 가슴에 새긴다"면서도 "이런 여성들의 마음에 늘 다가가는 일본이 되려 한다"고 미끄럼을 탔다.
중국과 미국에 대해서는 "전쟁의 온갖 고통을 겪은 중국인 여러분과 일본군에 의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입은 포로 출신 여러분"이라고 칭했다. 문맥상으로는 당연히 사죄의 내용이 나와야 할 대목에서 갑자기 "그토록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얼마만큼 마음의 갈등이 있었고, 노력이 필요했을까"라는 말을 갖다 붙였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를 본 한국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담화문을 읽었을 때, 화가 났지만, 부럽기도 했다. 얼토당토않게 끼워 맞추는 '말재주'와 이를 총리 이름으로 발표하는 뻔뻔함 때문이다. 일본에서조차 비판받은 이 담화에 대해 우리 대통령은 말재주도 없고, 뻔뻔하지도 못했다. 대신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지만, 침략과 식민지 지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근간으로 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국제사회에 분명하게 밝힌 점에 주목한다"며 별나라 이야기를 했다.
일본의 후안무치를 모른척하기도, 강력하게 대응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억지로 구실을 찾아 '발가락이 닮았다'고 외치는 꼴은 참 보기 민망하고 안쓰럽다.
영양가 없이 속만 뒤집는 이런 담화를 주거니받거니 할 즈음, 곳곳에서 광복 70주년 기념행사와 일제 잔재 청산 행사가 열렸다. 언론은 아직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의 삶을 조명했다. 매년 이맘때 봇물 터지듯 나오는 내용이지만 늘 그랬듯 입맛은 쓰다. 70년이 지나도록 뿌리 뽑지 못한 일제 잔재와 찾아내지 못한 독립운동가 이야기는 내년 이맘때에 또 나올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 북한과의 대치 등 국제 상황을 생각하면 일본과의 관계는 계륵이다. 내치지도, 그렇다고 끌어안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요즘 일본의 성향이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조 히데키 같은 전쟁광이나 사이고 다카모리 같은 정한론자(征韓論者)가 언제든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입발림도 마다치 않는 제2의 신조 같은 총리가 또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편하지만 두 눈을 부릅뜨고 일본을 감시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마냥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양 정상의 이번 담화는 우리가 새겨야 할 것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켰다는 점에서 교훈적이다. 용서를 받아야 할 자가 죄를 청하지 않는데 우리가 용서해야 한다고 떠드는 것은 '대인'(大人)의 풍모가 아니라 쓸개 빠진 짓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본을 용서하자는 일부 인사는 물론 '조용한 외교' 를 좋아하는 청와대와 외교부가 특히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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