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에서 멈춘 제 연기 '앨리스'로 부활해야죠
배우 이정현(35)에게 박찬욱 감독은 큰 힘이 됐다. 일종의 멘토라고 해야 할까? 박 감독은 2010년 동생 박찬경 감독과 함께 연출한 단편 '파란만장'의 여주인공으로 이정현을 기용했다. 단편 부문 금곰상을 따낸 이 작품도 화제가 됐고, 이정현도 큰 관심을 받았다.
'꽃잎'(1996) 이후 영화로는 이렇다 할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던 이정현은 '파란만장'(2014)으로 기대했던 연기로 인사할 수 있게 됐다. "20대 때 연기를 정말 하고 싶었는데 대부분 귀신 역할, 공포영화만 들어왔었어요. 그때가 연기적으로는 슬럼프였죠."
이정현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청순하거나 밝은 인물을 맡아 연기적인 뭔가를 해소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국 사람이다 보니 한국 작품이 항상 그리웠다. 그걸 풀어준 계기가 '파란만장'"이라고 회상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깨우쳐주셨죠. '너 배우인데 왜 연기 안 하느냐?'는 말이 울컥 와 닿았어요. 작품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늘 감독님께 물어봐요. 감독님께 안부 문자를 하면 답이 다음 날 오는데 일과 관련해 연락하면 빨리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시나리오 빨리 보내라고요.(웃음) '파란만장'에 출연하기 전에는 감독님을 몰랐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단편이지만 같이 해보자'는 말씀을 하셨을 때, 너무 좋아 막 뛰어다녔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대작들에 밀려 상영관 수가 적지만 좋은 평가를 받는 안 감독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이하 앨리스, 13일 개봉)도 따지고 보면 박 감독의 조언으로 참여하게 됐다. '꽃잎'에서 멈춘 그의 대표작이 바뀔 것 같은 작품이다. 이정현은 순수하면서도 광기 어린, 전혀 다른 표정과 말투, 행동으로 '앨리스'의 수남을 완벽히 표현했다.
"박찬욱 감독님이 저를 추천하셨는데, 안국진 감독님이 '정현 씨 바쁠걸요? 안 될 것 같다'고 했대요. 그러자 박 감독님이 '아닌데! 정현이 놀고 있는데! 빨리 연락하라'고 하셨대요. 그렇게 '앨리스'가 시작됐죠."(웃음)
'앨리스'는 평범한 행복을 바라던 수남의 이야기를 담았다. 청각장애인 남편과 결혼한 수남은 집을 사기 위해 대출받은 빚을 청산하려고 신문 배달, 전단 돌리기, 음식점 주방 보조로 일한다. 하지만 갈수록 팍팍한 삶이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와 참 닮았다. 대단한 걸 바라지 않지만, 그것마저도 힘든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절묘하게 비틀었다.
이정현은 "정말 새로운, 독특한 영화"라고 좋아했다. '꽃잎'의 미친 소녀, 최근작 '명량'의 말 못하는 정씨 부인 등을 연기했던 그는 이번에도 또 다른 강렬함을 전하는데, 연기하는 데 있어서 전혀 거부감이 들거나 고민이 되지 않았단다.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족한 작품을 만났기에 캐릭터에 공을 들였다.
그는 특히 "수남이 유아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한 남자를 위해서 뭔가를 헌신하는 여자는 더 순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순수한 것 같지 않나요?"(웃음)
성인의 것이라고 보이지 않는 수남의 글씨체가 순수함의 발현이다. 이정현은 "글씨가 수남의 성격을 대변한다고 봤다"며 "사실 감독님은 그 부분에 대해 별말씀은 안 하셨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했고, 네 살짜리 조카가 한글 쓰는 걸 보고 따라서 연습했다"고 회상했다.
극 중 등장하는 명함 날리기는 한 방송 프로그램의 '생활의 달인'을 보고 연습했다. 청소는 원래 쓱싹쓱싹 잘한단다. "집에서 하던 청소를 '조금' 빨리 감기한 버전일 뿐"이라며 웃었다. 가장 어려웠던 건 스쿠터를 타는 신. 두발자전거를 못 탔던 그는 촬영 3일 전에야 배웠고, 현장에서 가까스로 스쿠터 장면을 소화해냈다. "수남이가 생계를 이어가야 하니 스쿠터를 수월하게 타야 하는데 못 해서 고생했죠. 촬영 날 성공해서 다행이에요."
얼마나 현장이 좋았는지 이정현은 '앨리스' 촬영장에 사비를 털었다. 작품이 좋아 '노개런티'로 출연했는데, 여기에 스태프들 아침밥까지 챙겼다. 벌어들인 것 없이 마이너스다. "찍을 게 많은데 감독님이 오후에나 콜을 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아침밥을 먹고 오면 식비가 절감되니 그렇게 한 거래요. 풍족하게 배불러야 행복하잖아요. 배우로서 저는 아직 마이너스가 크진 않기 때문에 몇 년간은 괜찮아요. 어떤 또 다른 의미를 찾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왠지 이 작품이 그런 것 같아요."(웃음)
이정현은 한 남자에게 열과 성을 다하는 건 수남과 자신이 비슷하다고 했다. "저도 사랑하게 되면 한 남자밖에 몰라요. 한 번 만나면 오래 사귀거든요. 주위에서는 바보 같다고 그러죠. 그렇게 사랑받으려면 남자가 호감을 보이는 과정이 힘들겠다고요? 그래도 열 번 찍으면 다들 넘어가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런데…. 하하. 멋진 분을 만나면 제가 먼저 대시하기도 해요."
이정현은 '여성 영화'가 잘 되길 바랐다. 그는 "여자 영화는 상업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많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자들은 조연으로 나오는 분들도 무척 바쁘지만 여배우 대부분은 논다. 1년에 한 편 하면 많이 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저도 바로 다음 작품 계약해야 하는데 아직이라 불안해요. 이러다 또 몇 년 쉬면 안 되는데 말이죠. 여자 영화가 좀 더 많아졌으면, 잘됐으면 좋겠어요."(웃음)
센 캐릭터여야만 그를 섭외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관객들에게 감동과 임팩트를 주려고 찾다 보니 센 캐릭터를 많이 하네요. 우리나라 영화에는 여성 캐릭터가 있어도 너무 소모적으로 쓰이더라고요. 남자 위주가 많죠. 의미 없는 평범한 캐릭터 천지인데,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싶다 보니 찾고 찾다 이렇게 되네요. 그래도 가끔 평범한 캐릭터 섭외가 들어오긴 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제게 그리 인상적이진 않더라고요."(웃음)
이정현의 다음 작품도 평이하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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