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소중한 삼천리 우리 산하여/…/까닭 없이 꿈결에 온전한 나라 버리네/…/어찌 남아가 제 일신을 아끼랴/…/태평성세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
석주 이상룡(1858~1932)은 1910년 대한제국 패망 이듬해 2월 고향 안동의 99칸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 대저택을 두고 만주로 가족과 망명했다. 후일을 기약하며 '거국음'(去國吟)을 남겼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 항일독립에 생을 건 석주는 그러나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남의 땅에 묻혔다. '광복 전 내 유골을 옮기지 마라'는 유언과 함께. 광복 45년이 지난 1990년에야 조국에 돌아와 고향과 임청각을 둘러보고 대전국립묘지를 거쳐 1996년 국립현충원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됐다.
태극기에 뒤덮인 석주의 '태평성세 귀환'을 손자며느리 허은(1907~19 97) 여사는 눈물로 지켜봤다. 여사는 왕산 허위의 조카인 아버지(허발)를 따라 1915년 고향 경북 선산을 떠나 만주로 갔다. 1922년 석주의 손자(이병화)와 결혼해 고성 이씨와 인연을 맺었다. 가시밭길 항일집안 종부인 여사는 시할아버지 죽음으로 1932년 귀국, 임청각을 지켰고 60년 만에 시할아버지 혼백을 맞았다. 그리고 뒷날 여사는 회고했다. "오늘 이 순간까지 그토록 그리던 내 나라 이 땅에 숨쉬며 살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지금도 귓가를 스치는 서간도 벌판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지나온 구십 평생을 되돌아봐도 여한이 없다…머지않아 여러 영령들 뵈옵고 이토록 살기 좋은 세상이 된 것을 말씀드릴 생각하면 마음 뿌듯하다…"고.('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 소리가', 1995년)
여사의 시가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이준형), 남편 등 3대를 비롯해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명문가다. 정부가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가 훼손한 임청각 복원에 10년간 314억원을 투입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여사 생전에 이 소식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이토록 살기 좋은 세상'은 그냥 얻어지지 않았다. 여사처럼 묵묵히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고 항일에 나선 선열의 피로 이뤄졌다. 29일은 경술국치일이다. 대구, 경북 등에서는 이를 잊지 않으려 올해 처음 국기를 조기로 건다. 오늘 아침 조기를 달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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