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0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많은 인파가 모인 시위가 있었다. 일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대규모 시위는 청년단체 '실즈'(SEALDs)를 중심으로 12만 명(주최 측 추산, 경시청 추산 3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시위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일본 평화헌법 9조의 무력화를 반대하는 목소리였다.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무력공격 사태법 개정안 등 안보 관련법 11개 제'개정안은 중의원 본회의를 통과해 현재 참의원에서 심의 중이다. 아베 정권이 이를 강행 처리할 움직임이 알려지면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평화헌법 9조는 2차 세계대전 패전 국가인 일본이 일체의 군사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 것을 헌법으로 명문화한 것이다.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 보유를 하지 않으며 국제분쟁에도 일절 개입하지 않는 것을 명문화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직접적 피해를 본 주변 국가에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또한 평화헌법 9조가 있음으로써 일본은 국제사회의 일원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양심 있는 일본 지식인들은 평화헌법 9조가 있음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자신의 조국이 과거 잘못을 반성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라고 믿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양심으로 불리는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그랬고 애니메이션을 꿈과 동화의 영역으로 승화시킨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랬다. 일본 사회파 추리작가인 '모리무라 세이치', 베를린 국제영화제 칼리가리상을 수상한 영화감독 '소노 시온' 그리고 무라야마 담화로 유명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 일본 생활당 공동대표이자 13선 중의원으로 일본 정계의 거물인 '오자와 이치로'가 그랬다. 일본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12만 명의 시민들 생각도 다르지 않고 같은 날 일본 전역 300여 곳에서 동시에 모인 시위 참가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시위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다.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 이미 저명한 작곡가 '다카하시 유지'로부터 귀재 소리를 듣던 사카모토 류이치는 신주쿠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몰두한다. 그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후반은 일본에서 학생운동이 절정에 이르던 때다. 이른바 '젠카쿠렌'(全學連'전국학생자치회연합) 운동은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으로 극단적 투쟁 노선을 채택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배경으로 많이 사용되는 시기기도 하다.
일본이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이번 시위에 참여하면서 해외 언론은 이를 관심 있게 보도한다. 후두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시위 현장에 나와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이 일본인에게 뿌리내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지금 헌법을 위해 목숨을 걸거나 투쟁을 하는 역사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연설하는 모습은 유튜브 등을 통해 감동적으로 퍼지고 있다.
로이터통신의 보도처럼 이번 시위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과는 다른 모습이다. 1960년대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지만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적이며 헌법 존중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학생들과 젊은 여성들의 시위 참여가 이어지는 점도 다르다.
일본은 버블경제 붕괴 이후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시기를 보냈다. 정치적 발언은 소수의 목소리였고 구호 앞을 지나는 시민들의 무관심한 발걸음은 일본을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변화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겪으면서부터다. 반핵을 외치던 목소리는 반전과 평화의 목소리로 변했다. 1960년대 플라워 무브먼트(Flower Movement)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은 새로운 시대정신을 찾고 있다. 일본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아시아 민중의 각성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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