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과 관련된 이야기가 뜨겁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 대한민국이지만, 지금의 양상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이야기의 선정성이나 여성의 성적 대상화 이야기는 이미 구문(舊聞)이고 지금은 거기에 플러스 알파의 요소가 붙어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론되는 성과 관련된 문제는 '문란함'의 차원을 넘어 '정치적 올바름', 그리고 '인간다움'의 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여성 대통령이 집권했지만 이상하게 여성의 지위나 권익이 향상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한 남녀 간의 대립은 훨씬 심해졌고, 정치인들의 성적 일탈은 웬만한 에로 영화를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 소위 '개저씨'들이 젊은 여성들에게 저지른 성희롱과 성폭력 고발이 줄을 잇고 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성적 폭력에 관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매일신문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적 폭력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알아보기로 했다. 남녀 간의 사랑은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이것이 폭력으로 비화될 때는 절대 즐겁지 않은 문제이기에 '즐거운 주말'이라는 코너와 모순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폭력의 원인을 찾고 해결해 나가야 우리 사회가 좀 더 즐거워질 것이기에 조금은 진지하게 이야기해 보기로 한다.
이화섭 기자 lhsskf@msnet.co.kr
◇여성비하 쏟아낸 랩 "음악이야" 군 체험 프로에선 "엉덩이가…"
2015년 여름 대중문화계와 연예계는 난데없는 '성'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 대두하고 있는 성에 관한 논란은 선정성과 여성의 성적대상화의 문제를 훌쩍 뛰어넘어 남성이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으며, 이는 '여성혐오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으로 문제시됐다. 대중문화계와 연예계가 성적 폭력으로 논란의 난장판이 된 원인은 세상이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에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 달에 한 건씩 터진 논란
올해 대중문화계에서 성에 관한 논란은 한 달에 한 번꼴로 터져 나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7~9월까지 여름 동안 한 달에 한 번꼴로 성에 관한 논란이 연예뉴스를 장식했다.
7월부터 살펴보면 음악 케이블 채널인 엠넷(Mnet)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 미 더 머니 4'에 출연한 래퍼들의 랩 가사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7월 10일 자 방송분에서 아이돌 그룹 '위너'의 멤버이기도 한 래퍼 송민호가 1대1 랩 대결에서 'MINO 딸내미 저격/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가사가 여성 비하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대중들은 "송민호의 표현은 산부인과를 방문하는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이에 송민호는 '위너'의 공식 페이스북에 사과글을 올렸다. 또 '쇼 미 더 머니 4'에 출연한 래퍼 '블랙넛'의 경우 기존에 발표한 랩들이 문제가 됐다. 블랙넛이 'MC기형아'라는 예명을 쓰던 시절 발표한 노래 중 친구 어머니를 향한 성적인 내용이나 공공연히 강간을 묘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점, 그리고 'Higher than esens'(하이어 댄 이센스)라는 노래 가사에 여성 래퍼 윤미래를 성적으로 비하한 내용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8월에는 월간지 '맥심'의 표지 화보가 문제가 됐다. 8월에 나온 맥심 9월호 표지 화보는 '나쁜 남자'라는 콘셉트로, 트렁크 안에 발목이 묶인 채 들어가 있는 여성의 다리 옆에 배우 김병옥 씨가 트렁크 문을 붙잡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범죄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 문제에 대해 해당 잡지사인 맥심코리아는 "범죄의 요소를 사진에 포함한 것은 맞지만, 성범죄를 미화하지는 않았다"는 해명을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맥심'지의 미국 본사와 영국의 '코스모폴리탄UK'가 이 표지에 대해 규탄성명을 발표하자 맥심코리아는 결국 해당 잡지를 전량 회수'폐기하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9월에는 MBC TV '일밤-진짜사나이 여군특집'에서 문제가 터졌다. 여군 훈련을 받는 여성 연예인들이 제식훈련을 담당하는 소대장의 엉덩이를 언급하며 성희롱을 연상시키는 자막까지 달았던 것. 결국, 소대장의 가족이 MBC에 불쾌감을 표시했고,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은 "그들의 사담을 편집으로 연결한 제작진의 부주의였다"며 "방송을 보고 불쾌감을 느낀 분들이 계신다면 사과드리고, 앞으로 더욱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앞서 말한 사건들은 논란으로 크게 번진 것들만 정리한 내용이다. 문제는 가수 성시경이 올리브 TV(O'live TV)의 프로그램 '오늘 뭐 먹지'에서 여성 작가를 비하하는 제스처에 대해 시청자들이 불쾌감을 표현했던 일 등 논란으로 번진 것 말고도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이 꽤 많았다는 사실이다.
◆일상화된 성적 폭력에 둔감해진 사람들
예전부터 대중문화 속에서 여성이 성 상품화됐다는 이야기는 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성 상품화' 논쟁을 넘어 '성적 폭력의 일상적 노출'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문제는 성적 폭력에 둔감한 미디어의 태도다.
'진짜사나이-여군특집'에서 발생한 논란 또한 미디어가 성적 감수성이 매우 무디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여성 출연자들은 남성인 소대장을 '성적 대상'으로 봤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었던 것도 문제지만,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걸러내지 못한 제작진에게도 그 책임이 컸다. 특히 '진짜사나이'는 이전에도 남자 군인들의 탈의 장면과 샤워장면을 그대로 내보내며 "어머~ 이건 봐야 해~"라고 자막을 달았던 적이 있어 성적 폭력 문제에 둔감함을 보여줬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맥심'의 9월호 표지는 '여성에게 폭력과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나쁜 남자=멋진 남자'라는 공식을 그대로 미디어가 수용한 극단적 사례로 볼 수 있다. 2011년부터 3년간 경찰청에 집계된 6천800명의 데이트 폭력 가해자 중 대부분이 남성인 대한민국에서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모습을 화보로 담아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잡지 제작진들의 성적 감수성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심영섭 교수(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는 "미디어가 도덕적이고 미학적인 고려 없이 센세이션을 일으키고자 여성혐오적 발언과 성적 편견이 강한 표현을 거르지 않고 내보내고 있다"며 "한마디로 대중매체에서 성에 대한 오해가 굉장히 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적 폭력에 둔감한 미디어의 태도는 미디어를 수용하는 일반 대중에게 그대로 전파됐다. 실제로 페이스북에서 '상남자'라는 이름으로 그려지는 만화는 이렇게 진행된다. 여성이 남성에게 뭔가를 제안하거나 질문하면 남성은 여성을 때리고 나서 여성을 띄우는 멘트로 끝을 맺는다. 문제는 이런 만화에 '좋아요'가 2천 개 이상 달리고, 이 페이스북 페이지의 팔로워가 3만 명이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의 심각성에 대해 사회가 둔감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해외에선 이미 반성 중
성적 폭력 문제가 더욱 접점을 찾지 못하는 데에는 대중문화 소비자가 성적 폭력 문제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이 결여돼 있는 경우도 한몫한다. 특히 '쇼 미 더 머니 4'는 출연자들의 갖은 여성 혐오'비하 발언과 퍼포먼스에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발표한 음원은 음원대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송민호와 블랙넛의 여성 비하 발언을 비판하는 것을 본 일부 힙합 팬들은 "예술에 왜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미는가"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힙합 음악의 본토인 미국에서는 오히려 힙합이 가지고 있던 여성 비하 문제에 대해 기존 래퍼들이 반성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달 23일 래퍼 '닥터 드레'는 뉴욕타임스에 "과거에 상처를 준 모든 여성들에게 사과한다. 내가 과거에 한 일들을 깊이 사과한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과가 닥터 드레에게 악재가 되리라 예측했지만, 그가 16년 만에 최근 발표한 앨범 '컴턴'(Compton)은 빌보드 앨범 차트 순위 2위에 올랐다. '쇼 미 더 머니 4'에 게스트로 출연했던 미국 래퍼 '스눕 독'도 한때 여성 비하 표현을 자주 썼던 사실에 대해 "내가 자란 환경에서는 그런 점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며 사과하기도 했다.
대중문화 속에 나타난 성적 폭력 문제는 결국 여성에 대한 시각이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한 미디어가 단지 주목을 받으려고 성적 논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요소를 계속 자극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미디어 수용자층이 만들어 낸 합작품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의 당사자가 남녀가 아니라 성적 폭력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미디어와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미디어 수용자의 대결로 전환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의 시각이다. 심영섭 교수는 "맥심 표지 문제의 경우 독자들 간의 논란이 있었고, 교체 요구가 있었음에도 결국 태도를 바꾸게 된 계기는 미국 본사와 영국 잡지의 문제 제기 때문 아니었느냐"며 "소비자들이 성적 폭력을 저지르는 미디어에 대한 강력한 시정요구가 뒤따라야 해결되는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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