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라언덕] 성냥팔이 소녀의 죽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인기가 대단했긴 하나 보다. 막 내린 지 한 달이 훌쩍 지났지만 출연 배우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여전히 화제다. SNS 사진 한 장이 누리꾼 사이에 뜨거운 논란을 부르는가 하면 이들이 출연만 하면 시청률이 치솟는다.

문득 1월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저녁 식탁에서 집사람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응팔'에 심기가 불편해진 듯했다. 웬 열! 너무 재미있다며 '본방사수'를 외치던 사람이?

아내가 못마땅해 한 것은 쌍문동 아이들의 '화려한' 입시 결과였다. 만날 어울려 놀았어도 모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다는 해피엔딩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또래인 자신의 추억과 학부모로서 녹록지 않은 현실이 더 슬펐겠지만.

40대 주부의 볼멘소리를 듣다 보니 극 중 인물들의 인생 후반부가 궁금해졌다. '금수저 은수저'가 아닌 그들이 '헬조선'에서 45세가 정년(停年)이라는 '사오정'이 되진 않았을까? 삶의 모든 가치를 포기한 'N포세대' '캥거루족' 자녀 탓에 속상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 땅을 살아가는 중장년층 대부분은 이 물음에 행복할 리가 없다고 답하지 않을까. 그만큼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정서는 '우울' 내지 '비관' 일색이다. 노후 준비가 안 된 채 조만간 직장에서 물러날 50대나, 구조조정을 걱정하는 40대나,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포기한 30대나, 입학하자마자 취업 준비에 목매는 20대 대학생이나….

뉴스를 보면 고구마 100개 먹은 것처럼 답답한 소식뿐이다. 지난해 폐업 자영업자는 5년 만에 최대 규모였고, 올 1월 청년실업률은 16년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다. 국가 잠재성장률은 올해 2%대로 하락한다고 하고,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응팔'의 주인공들이 드라마에서 선택한 직업도 다분히 세태를 반영하지 않았나 싶다. 의사(선우), 법조인(보라), 장교(정환), 스튜어디스(덕선) 등이다. 어쩌면 드라마의 배경이던 1980년대보다 선호도가 더 높아 보이기도 하다.

이 같은 직군으로 이어지는 대학 문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취직 걱정을 안 해도 되거나 덜 해도 된다는 공통점 덕분이다. 경찰대, 교대 등 특수목적대 역시 최상위권 수험생으로 넘쳐난다. 지난해에는 입사 1년 차 대기업 신입 사원이 명퇴를 종용당했다는 언론 보도가 대학'전공별 합격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게 입시 학원가의 '정설'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인재들이 적성은 무시한 채 장래 벌어들일 소득만 따지고, '호모 인턴스'가 되지 않으려고 중학생 때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나라의 미래가 밝을 리 없다. 미적분을 쉽게 풀고, 영어 단어 몇 개를 더 알아 좋은 대학 진학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내건 나라가 '헤븐 조선'이 될 리 만무하다.

이불 바깥을 겁내며 도전하지 않는다고, 꿈을 꾸지 않는다고 젊은 층을 몰아세울 일도 아니다.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하게 따져보면 미래의 주인인 아이들이 일찌감치 현실에 안주하게 한 것은 바로 기성세대 아닌가! '노오오력'은 하지 않으면서 세상 사는 요령만 터득하려는 게 우리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남의 애는 몰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장래가 확실한 직업은 이것저것이다'라고 가르치는 게 솔직한 민낯이다. 부끄럽고 씁쓸하다.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에서 시간의 비생산적 소비 여부로 인간을 구분했다. 사회에 도움되는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그 위에 기생하면서 자신의 여가와 부를 과시하는 상위층과 이들을 동경하는 하위층으로 나눴다.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하기에 앞서 유한계급이 되겠다는 탐욕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되돌아볼 때다. 환상을 좇다 불쌍하게 얼어 죽은 성냥팔이 소녀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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