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단 한 여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누가 조국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한다. 그래서 관악에 사는 학생들에게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하더라도 잘못된 바위를 깨뜨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시골에서 부모님이 보내 주시는 학비에 담긴, 출세하고 이름을 남겨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크나큰 무게감도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앞에 나서서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와 자부심을 저버리지도 못해서 뒤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은 운동권 학생들에게 항상 빚을 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고, 그 부채 의식은 열등감과 부끄러움이 되어 사람을 예민하게 만들었다.(예전의 서울대 병은 이런 것이었었다.) 그렇지만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항상 예민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선두에 서서 큰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변절할 때도 끝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는 불의가 지배하는 시대를 사는 학생의 가장 솔직한 자기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사촌이자 친구인 송몽규는 언제나 신념에 찬 모습으로 겁도 없이 행동하지만, 윤동주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늘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를 외면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늘 어정쩡하게 있어야만 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한 적도 없고,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강물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반석이나 언덕과 같은 떨어진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사소한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내성적이었지만 누구보다 깊이 사랑하고, 누구보다 시대를 슬퍼했기 때문이다. 선동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적인 고뇌가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일제강점기 시들 가운데 가장 반짝이는 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