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이성복의 '그날' 중에서)
다시 4월이다. 대한민국의 4월은 슬프다. 특히 그날, 4월 16일.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 안방으로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생중계되던 그날 이후 내 내면의 시간은 정지해버렸다. 내가 만드는 모든 낙서는 부끄러움과 치욕과 고통으로 가득했고, '내 구명조끼 입어'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라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언어를 지배해버렸다. 며칠 동안 낙서장에 '기울기'라는 단어만 가득 채우기도 했다. 2016년, 지금 우리 사회는 얼마나 '기울어' 있을까? '구명조끼'는 찾을 수 있을까? 이성복의 '그날'은 35년이 지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세상은 운행하기가 힘들 정도로 기울어 있는데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제는 이성복이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구도 병들었음을 알려주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아니, 소리쳐도 그때만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35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그날'의 풍경. 드라마 '시그널'에서 20년 전의 이재한 형사가 말했다. '거기도 그럽니까? 돈 있고 빽 있으면 무슨 개망나니 짓을 해도 잘 먹고 잘 살아요?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라고. 슬프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심각해졌다. 여전히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밥을 먹고, 출근하고, 술을 먹는다. 사실 그러한 것들이 달라질 수는 없다. 그것은 일상이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니까. 하지만 '아홉 시에 학교로 가는 여동생, 퉁퉁 부어오른 어머니의 낡은 다리,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 집 허무는 사내들'의 풍경은 조금은 달라졌으면 했다. 그것이 시인 이성복이, 또는 드라마 주인공 이재한이 꿈꾸었던 삶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더 나쁘지 않게 하려고 몸부림치는 소수에 의해 그래도 숨 쉬고 살아간다는데 그 소수조차도 이젠 지친 형국이다. 여전히 뒹구는 돌은 돌의 모습 그대로 뒹굴고 살아간다.
'그날'이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의 영역은 다양하다. '그날'이 행복한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이 더 많다는 것이 우리의 '지금, 여기'의 삶을 증명한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그의 말처럼 '문제는 우리의 아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이다.'(시집 뒷표지 글) 하지만 아프게 하는 것들을 인식하는 것은 사실 이면에 숨은 진실을 찾아가는 길이다. 진실은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35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까.
아무리 세상이 달라져도 우리가 인간임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인간'(人間)이 무엇인가? 문자만으로도 이미 인간은 사람(人)과 사이(間)의 의미가 합쳐진 것이 아닌가? 나를 넘어서 타인과의 사이, 그 관계에 주목할 때, 비가 올 때 우산을 함께 쓰는 상황을 넘어 함께 비를 맞아주는 마음을 가질 때 '지금, 여기'의 갈등과 반목도 넘어서고, '그날'의 아픔과 모멸, 그리고 부끄러움도 극복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분명 '인간'(人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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