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킥킥, 당신이란 말 참 좋지요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의 기대, 나 킥킥……,(중략)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 집' 전문)

허수경의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30대를 갓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20대에 꿈꾸었던 대서사의 몰락을 목도했었고, 정약용의 '배반된 이상 국가'라는 말을 매일 되씹으면서도 아직은 세상은 살 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김치를 안주로 삼아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현실은 무너지는 담벼락 아래에 쭈그려 앉아있는 절박함 그대로였지만, 꿈은 신기루처럼 여전히 허망한 채로 내 주변만 맴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걷다 보면 어디엔가 도달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허수경의 시는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나는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짐작했다. 물질이든 생명이든 유한한 주기를 살다가 사라져갈 때 그들의 영혼은 어디인가에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그녀의 말이 좋았습니다. 이렇게 절박하게 살다 보면 내 영혼도 그 모습으로 작은 역사가 될 거라는 것. 그렇게 기대하면서 하루를 살면 된다는 것. 허수경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하다 홀연히 독일로 떠나, 발굴 현장 땡볕 아래서 유적지를 탐사하고 고대 동방 고고학을 연구하다가(그녀는 시인이기 이전에 고고학자입니다.)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를 때면 램프를 밝히고 단정하게 책상에 앉아 모국어로 글을 썼습니다.

'혼자 가는 먼 집'은 그런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시집에 실려 있는 다른 시들도 그렇지만 허수경은 독특하면서도 비형식적인 가락으로, 세상 한편에 들꽃처럼 피어 있는 누추하고 쓸쓸한 마음에 대해 노래합니다. 사라져가고 버림받고 외롭고 죽어 있는 모든 마음들, 이 세상의 날카로움으로 인해 긁히고 갈라지고 부러진 마음들을 여성성으로 애무하고 품어줍니다. 왜 '혼자 가는 먼 집'일까요?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삶의 길.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바로 그 참혹함은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밟힌 풀, 사랑과 상처, 자연의 달과 별(본문 중)'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찾아가는 그 집은 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당신도 이미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숨을 쉬고 살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막혀버렸고 어디에도 출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삶이란 건 원래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절대적으로 절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길은 걸으면 만들어지는 것이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점점 그 막힘이라는 것이 버겁습니다. 곳곳에서 마개를 막아버리는 냉혹함과 비열함도 마다하지 않는 세상의 잔인함이 두렵습니다. 뭔가 변화를 위해서 몸치는데도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두꺼운 것이 세상이고 무거운 것이 사회라는 존재입니다. 두려운 건 변화를 바라는 혁명의 시간이 시간과 더불어 상투화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모순도 오래되면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지요. 시간은 변화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함께 달려가지 않으면 이미 과거입니다.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기 위해 막 달려가고 있지만 그것이 도구화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이미 새로운 억압체라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그것을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계속 믿고 살아가고 싶은 진실. 그건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억압을 말하면 이리 답하고 싶습니다. '킥킥'이라고. '킥킥' 하는 언술이 통쾌하면서도 묘하게도 슬픕니다. 하루 종일 귓가에 '킥킥'이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울림과 어울리지 않음의 경계는 없는 것 같다는 느낌. 그 길항(拮抗)의 시간. '그대'라고 하지 않고 '당신'이라 표현한 시인이 고맙습니다. 나도 물어봅니다. '당신'이란 말 참 좋지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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