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수태골을 다시 오른다. 몇 주 전에는 울긋불긋 찬란한 빛으로 가을을 찬미하느라 법석이었는데, 화려한 날개를 벗어던진 활엽수의 모습은 흡사 축제가 끝난 파장 같은 쓸쓸함이 겨울을 재촉하는가 보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을 바라보며 희망에 부풀고, 초여름이면 신록의 향긋함에 덩달아 힘이 솟는다. 삼복 염천에는 짙푸른 녹음이 지친 심신을 풀어주는 안식처를 제공해주니 그런대로 좋다. 그리고 가을이면 불타는 열정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나에게는 아린 사연 하나가 중추신경에 걸려 있다. 연둣빛 새싹을 키워 팔랑팔랑 반짝이는 재롱도 보고 꽃과 열매를 맺어 흐뭇한 때도 다 지나가고 외롭게 남아 산을 지키고 있는 나목은 오직 자식들을 위한 기도에 여념이 없는 시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진다.
앙상하게 벗은 나목과 유난히 대비되는 게 소나무다. 소나무의 고고한 품격은 세한도에 멋스럽게 회자되었고 애국가 가사에서도 꿋꿋함을 노래하였다. 다만 내게 각인된 소나무의 이미지는 그런 사치스러운 사연과는 동떨어진 아픔이 얽혀 있다. 스산한 바람 탓인가, 오늘따라 솔숲에서 시어머니의 체취가 진하게 밀려온다. 뾰족한 솔잎 끝이 명치를 찌른다. 납덩이같이 무거운 청솔가지단을 힘겹게 머리에 이고 야음에 골짜기를 내려오시던 시어머니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청솔가지 한 단의 무게가 도대체 얼마이기에 내가 그토록 울컥했을까.
신혼 시절, 겨울방학을 며칠 남겨둔 추운 겨울날이었다. 갑자기 어두침침한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퇴근해 마당에 들어서는데 인기척이 없다. 어머님이 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저녁 준비를 해 주셨기에 걱정이 앞섰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게 주인집 할머니가 만석봉에 가셨다고 일러 주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길 속으로 서둘러 마중을 나섰다.
하늘은 일 년 내 모아 둔 눈을 한꺼번에 쏟아 내려는지 윙윙 소리를 내며 거침없는 폭설을 뿌려대었다. 임신 8개월이었던 나는 남산만 한 배를 앞세우고 눈 속으로 한 걸음씩 걸음을 재촉했다. 아버님을 여의고 얼마지 않아 안 그래도 가엾어 보이고 늘 눈가에 눈물방울을 달고 계신 어머니였다. 오늘 같은 날 왜 산으로 향했는지 모를 어머님을 걱정하며 발걸음을 내딛는데 갈수록 눈바람은 더 거세어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동네 어귀에서 허적허적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오시는 어머님을 만났다. 온몸이 눈사람처럼 하얗고 창백한데 머리 위로 청솔가지 묶음 한 다발을 이고 계셨다. 어머님의 하얀 머리 위로도 청솔가지 묶음 위에도 함박눈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반가움에 "어머님" 하고 불렀더니 흠칫 놀라시며 "춥다. 어서 가자. 왜 나왔노?" 하시며 겸연쩍어하셨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뭇단을 뺏다시피 받아 이었다. 어머님과 함께 집으로 오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한가득 부른 배로 머리에 한 다발 청솔가지를 이고 오면서 내가 왜 그렇게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궁상스럽게 왜 이러시느냐고 어머님께 쏘아붙이고 싶은 못된 성미를 숨기느라 입술을 깨물었었다.
청솔가지가 무에 그리 귀해 어머님이 함박눈이 내리는 날 산으로 가셨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어리석게조차 느껴지는 일이지만 1960년대 그 시절에는 연탄불조차 없었다. 아궁이에 나무토막을 태워서 방구들을 덥히고 세 끼 밥을 하던 때였다. 국가 시책으로 산림녹화 10개년 계획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입산 금지 팻말이 산 입구를 지키고 있는 터라 쉽게 땔감을 구하러 갈 수도 없었다. 제재소에서 썰고 난 피목을 사서 리어카로 실어다 쓰고, 밤중에 몰래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 장작을 사다 쓰곤 했다. 그 시절 청솔가지는 불쏘시개로 쓸 수 있는 요긴한 땔감이었다.
순탄하지 않게 신혼살림을 시작한 우리에게 어머님은 무엇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셨을 터이다. 눈이 쏟아지는 산골 마을에서 첫아이를 가지고 희망을 품으며 애면글면 살아가는 아들 내외에게 당신이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이었을지 모른다. 아이를 가진 며느리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방 아랫목이라도 데워 마음까지 얼게 하고 싶진 않으셨을 터이다. 가난만 물려주었다는 자책으로 도와줄 방법을 찾으시다가 생각해낸 당신만의 자식 사랑이 그 추운 날 청솔가지 단을 이게 했으리라.
하얀 머리 위로 더 흰 눈발을 맞으며 서 계시던 그 시절의 어머님처럼 내 머리에도 소복이 새하얀 눈이 내렸다. 힘겹기만 하던 시간들도 이제는 추억이 되어 아련한 순간으로 가슴속에 액자처럼 걸려 있다. 하얀 눈보라 속에 꽁꽁 언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과 그날 어머님의 옷자락에 묻어 있던 한기를 잊을 수가 없다. 아프기도 하고 서럽기도 했던 시간들이 아직도 내게는 회한으로 가슴 한쪽을 가득 채우고만 있다.
지나가버린 시간, 기억의 편린들을 고운 추억으로 길어 올리는지 소나무가 잔가지를 흔든다. 스위치만 누르면 실내 온도를 데울 수 있는 편리한 주거 공간에 살고 있지만 어머님의 청솔가지 묶음 위에 내려앉은 함박눈은 오늘도 순백의 언어로 그리움을 노래한다. 생전에 살갑게 해드리지 못한 순간들이나, 담아두고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 또 끝내 해보지 못한 말들이 청솔가지 끝에서 되살아난다. 마음속에 언제까지고 감춰두려 했던 내 어리석음까지도 되돌리고 있다.
청솔가지 끝으로 서늘한 바람이 인다. 다 태울 듯 불타오르던 단풍들도 낙엽이 되어 길을 떠난다. 뼈처럼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도 휑해지는 느낌이다. 후회와 홀가분함이 마음 가득 바람으로 불어오더니 철 이른 진눈깨비를 뿌린다. 나무가 조곤조곤 다시 숨겨둔 겨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파리가 어디론가 굴러가 겨울을 이겨낸 나의 시간들을 미련으로 되돌리고 있다.
청솔가지를 인 어머님께서 그때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들을 다시 듣는다. 아들 내외의 방만 덥혀 주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혹독한 세월 속에서 가슴의 온도를 꺼지지 않게 해주셨던 어머님의 마음을 읽는다. 눈보라 치는 날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으면 새잎이 돋아나고 푸르게 피어날 날이 있을 거라 응원하시던 어머님, 그날 눈 속에 서 계시던 어머님이 내 삶의 불쏘시개였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솔가지 끝으로 감추고 싶었던 가슴 저린 말들을 하염없이 쏟아내며 가을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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