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 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중략)…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중에서)
1980년대 황지우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사건이었다. 1983년 그의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가 세상에 내던져졌을 때 사람들은 시를 모독하는 불경스러운 말장난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격렬한 풍자와 야유, 질타와 저주, 냉소의 언어들을 버무린 그의 시를 '형태 파괴의 시'라고 단순화시키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그를 만나러 담양 명목헌으로 달려갔지만 부재하는 그를 만나지는 못하고 명목헌 앞 연못에 드리워진 목백일홍의 붉은 색깔에 넋을 놓아버렸다. 그래서 나에게 황지우는 명목헌 목백일홍이다. 겉으로는 한없이 화려해 보이지만 낙화가 만드는 슬프고 지친 풍경의 얼굴로 가슴을 멍하게 만든다. 가차없이 내리치는 그의 칼날에 우리들 삶은 난도질당한다. 그런데 시원하다. 그래서 활짝 웃는다. 실컷 웃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린다. 그게 황지우의 시다.
황지우의 시가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넘어가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말들로 시끄럽다. 매일 매스컴을 채우는 말들, 그것이 모두 진실이라 확인하는 건 쉽지가 않다. 대부분 말에 그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바라보는 사람들, 아니 아예 달이 아니라 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다. 세상은 망가진 어휘의 더미들로 가득하다. 하나의 단어가 지니는 의미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문제는 악의적으로 이용하다 보니 아름다운 어휘조차 망가져 버린 예도 허다하다. 말의 본질이 무너지면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기보다는 함께 비를 맞고 싶은데 나는 무력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두 폐허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진짜 쓸쓸해졌다. 표현을 수정해 봤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였다. 그래도 쓸쓸함이 줄어들진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자신만의 폐허를 보여준다고도 했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라는 것이 반드시 '사람'만은 아닐 게다.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이 절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시인처럼 뼈아프게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심하게 절박하다.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없는, 시간이란 괴물은 매순간 현재의 길을 걷는 나를 압박한다. 몸서리를 치면서 거부의 몸짓을 보내지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달려가는 시간에 보폭을 맞추지 못한 나는 자꾸만 뒤로 밀렸고 절박함이 절박함을 밀어내는 반복 속에서 여기까지 다다랐다. 이제는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끝'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컴퓨터 D드라이브에 '이제는 마무리'라는 파일방을 만들었다. 작은 후회들이야 없지 않았지만 최소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에 대해 내가 지닌 정성을 다했다.
'이제는 마무리'라는 방을 마련했지만 사실은 '끝'에 대한 정리도, '끝' 다음에 대한 준비도 전혀 하지 못한 상태다. 둘러싼 모든 것들은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여기에 멈춰 서서 멍하니 바람만 만지고 있다. 바람조차 만질 수 없는 시간도 언젠가는 다가올 테니 행복한 거 아닌가? 최소한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는 황지우보다는 행복하다. 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절대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통해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나와 더불어 걸어가는 사람도 있음을 믿는다. 무너지는 담벼락 아래의 절박함도 많았다. 더 절박할 수 없을 만큼의 절박함도 그 절박함으로 견뎠다. 지옥 같은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으로 견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내 깜냥으로 감당할 수 없다. 내 몫이 비록 아픔과 슬픔뿐일지라도 사실은 그 선택조차 내 몫이다. 이제 곧 목백일홍이 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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