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그렇게 말렸는데
어미 소와 젖을 뗀 송아지를 팔고자 아버지와 함께 하양장에 갔어. 암소는 팔아 빚을 갚으려고 했지. 어미 소는 시세가 맞지 않아 팔지 않고 새끼만 팔았어. 나는 소를 몰고 집으로 왔지. 아버지는 송아지 판 돈을 주머니에 넣고 문상 간다며 박사리에 들렀어. 정미소를 운영하는 정원덕 씨가 돌아가셨어. 그분은 진외가 친척이야. 할머니는 뭔가 찝찝하다며 가지 말라고 말렸지. 요즘도 그렇지만, 초상집에 갈 때는 가리는 것이 많았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언제 아셨나요?"
"이튿날 아침에 진외가에서 연락이 왔더군."
"아버지 시신은 어디에 계시던가요?"
"달려가 보니 예배당에 안치해 놓았더군. 칼이 옆구리를 관통했어. 목덜미에 시퍼런 멍도 들었고."
"어떻게 십 리 길을 모시고 오셨는지요?"
"우리 집안에서 소구룸마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모시고 왔어."
"송아지 판 돈은 어떻게 됐는지요?"
"불에 타 버렸는지, 돈을 찾았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돈 찾을 정신이 어디 있었겠노?"
"구호품을 받은 적이 있는지요?"
"재떨이를 받은 것이 기억나네. 누구는 백구두를 받은 사람도 있다던데.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이 아닌지 모르겠어."
사망자 38명 중, 다른 마을 세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그중 한 분이다.
#2. 김사원 40세. 장남 김임석 15세. 와촌 음양리
초저녁에만 해도 아버지 무릎에서 재롱 떨었어
우리 집은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곳이잖아. 놈들이 자주 내려와 괴롭혔지. 주위가 소란하면 몸을 피했어. 피난처는 아카시아 울타리야. 아카시아 뿌리가 사과나무에 넘어가지 못하도록 골을 파 놓은 곳이 은신처였어. 방공호 역할을 한 셈이지. 아버지는 그날 저녁, 마을 정미소에 상문을 갔어. 정미소를 운영하는 정원덕 씨 팔이 벨트에 말려들어 사망했어.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모양이야. 그분도 교회 영수(장로)였고, 아버지도 교회 영수였어. 두 분은 매우 친했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희생당했어. 초상집에 가기 전, 나는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저녁을 먹었어. 그것이 아버지와 영원한 이별 장면이야. 놈들이 정미소를 학살의 현장으로 삼은 것은 치밀한 계획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
그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공비들은 사람이 많이 모인 초상집을 노렸을 것이다. 정미소 울타리는 철망이었다. 맞은편 골목은 막다른 골목이다. 입구를 봉쇄하여 도망갈 곳을 차단한 치밀한 작전이었다.
그 후 토벌 작전을 펼쳐 생포한 공비를 공개 처형했을 때, 놈의 시신을 할아버지가 거뒀다고 들었어. 할아버지도 교회 영수였어.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소행은 이가 갈리도록 미웠겠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시신을 수습했을 거야. 신앙이 두터운 할아버지는 부흥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녔으니까.
"아버지의 풍채가 대단했다던데요?"
"할배와 아부지는 육 척 장신이야. 아버지 시신을 옮기는 데 애를 먹었다더군.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아버지의 무덤을 자주 찾았어. 그곳에서 흐느끼는 것을 자주 봤어."
#3. 사망자 김영달 34세. 아들 김진호 4세
형님은 그의 생일에 돌아가셨어. 죽어서도 아내를 기다렸다
윤수 형님의 생일이었어. 엄마와 생일이 같은 날이야. 생일상을 조촐하게 차리고, 가족이 모두 모여 놋그릇을 닦고 있었지. 형은 장가든 지 겨우 일 년 지났어.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음력 10월 11일)은 형수가 시집오는 날이었어. 갑자기 삽짝에 달아놓은 요롱소리가 요란하게 울더군. 총을 든 몇 명이 형을 잡아갔어.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형은 사 년 만에 돌아왔지. 우리 식구는 어쩔 줄 모르고 밖에 나왔어. 이웃인 김수용'윤성구 집은 이미 불타고 있더라고. 신대 어른(방차암의 아버지)이 헐레벌떡 오더군. 이 집 큰아들 윤수가 죽었다며 연락하더라고. 그 어른의 아들, 방차암은 정미소에 끌려가 팔을 잃은 줄도 모른 채.
어머니와 함께 학살의 현장인 홰나무보에 갔어. 여덟 명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더군. 형을 찾았을 때, 얼굴과 입언저리가 으깨어져 있었어. 물께돌 수위를 조절하는 돌로 잔인하게 쳤던 모양이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형은 놈들에게 당차게 대들었을 것 같아. 망가진 형님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어. 이웃인 윤재근 어른에게 들은 얘긴데, 형님은 탈출을 시도하다 다시 붙잡혔대. 그 어른도 물께돌로 맞아 얼굴이 엉망 됐지.
"형님을 모시고 와서 어떻게 조치했는지요?"
"쓰러져 있는 형님을 집에 옮겼을 때는 몸이 따뜻해 살아있는 줄 알았어. 그저 정신을 놓아버렸다고 생각했지. 어머니는 끓인 물에 참기름을 태워 연방 형의 입에 떠넣었어. 윤수야 윤수야! 부르면서. 반 대접가량 떠먹였을 거야. 삼키는 줄 알았는데, 방바닥에 물이 흥건하더라고. 반듯이 눕히는 순간, 형의 고개가 옆으로 축 처졌어. 옆구리에 총구멍이 뚫려 있더라고. 급소를 관통한 모양이야. 죽음을 확인한 우리 집은 울음바다가 됐어."
"장로님은 어떻게 화를 면했습니까?"
"하나님이 보호한 것 같아. 놈들이 형님을 끌고 간 뒤, 나는 옷가지와 식량을 자루에 넣고 담을 타고 넘었어. 한달 당산나무 아래서 공비 여러 명이 나를 잡으러 오는 거야. 줄행랑을 쳐 소깝삐까리 청솔더미에 숨었어. 당산나무 아래가 놈들의 본부였고, 거기서 작전지시를 내린 것 같아."
"형수는 어찌 됐습니까?"
"친정이 대구 달서구 감삼동이었어. 교통편이 없어 하양에 사는 김순도 장로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사건이 터진 다음 날 우리 집에 왔어. 반갑게 맞아야 할 신랑이 죽었으니 얼마나 참담했겠노? 친척 여럿이 한꺼번에 죽었으니 정신없었어. 다른 분들은 아침 일찍 장례를 치렀지만, 우리 형은 장례를 치르지 못했어. 상주인 형수가 도착하지 않았으니까. 형의 장례는 와촌교회의 도움으로 치렀어."
"그 후, 형수의 행적은요?"
"형수는 일점혈육도 없었어. 팔자를 고치라는 어머니 말을 듣지 않더군. 형수는 오랫동안 혼자 살았어. 형님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절마다 집에 다녀갔어.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재혼했지. 재혼하고도 가끔 연락하더라고. 지금은 연락을 거의 끊었지만. 형은 일본물을 사 년이나 먹었으니 신문물에 밝았어. 형님이 일제강제노역에 끌려갈 때, 형님 친구(강천수)가 손수 깃발을 만들어 전송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뚜렷이 남아있어."
"장로님 아버지는 어떻게 무사하셨는지요?"
"아부지도 정미소에 가셨지. 정미소를 운영하던 분이 돌아가셨으니까. 그분은 같은 교인이라 아버지와 친했어. 아버지도 친구들과 함께 꿇어앉았어. 끌려간 친구들의 비명을 듣고 그대로 도망쳤대. 처음에는 낙산댁 웅덩이에 몸을 피해 있다 돼지비알에 숨었어.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왔더군."
#4. 사망자 김윤수 27세. 동생 김태수 16세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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