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 <13> 전남 영광 불갑산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워, 꽃잎도 빨갛게 멍이 들었나

불갑사 입구에서 일주문을 들어서면 330만㎡(100만 평)의 상사화 군락지가 펼쳐진다. 엄홍길 대장과 원정대원들이 꽃무릇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불갑사 입구에서 일주문을 들어서면 330만㎡(100만 평)의 상사화 군락지가 펼쳐진다. 엄홍길 대장과 원정대원들이 꽃무릇밭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여름 녹음과 가을 단풍 사이, 이 시기엔 꽃이 귀하다. 이 짧은 시기에 붉은 정염을 펼치며 여심을 유혹하는 꽃이 있다. 상사화 즉 꽃무릇이다. 정열적 색감의 꽃잎은 순식간에 관찰자의 시선을 빼앗아 꽃에 매몰시켜 버린다. 꽃무릇 하면 고창 선운사, 함평 용천사를 떠올리지만 특별히 이 꽃을 아끼는 곳이 있다. 영광군은 330만㎡(약 100만 평) 군락지를 조성, 군화(郡花)로까지 지정하며 관광상품으로 특화해 전국 여행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처럼 꽃에 깃든 사연도 애틋하다. 신록과 단풍을 잇는 '황홀한 가교' 상사화를 보러 영광 불갑산으로 떠나보자.

호남의 명산에서 좋은 기운 받으려 모인 1천500여명의 원정대원

그동안 대구경북, 중남부 지역으로 코스를 한정했던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의 '엄홍길과 함께하는 한국 명산 16좌'가 이번엔 버스를 전남 영광으로 돌렸다. 영광은 장성, 담양과 위도를 나란히 하는 남부도시로 서해와 인접한 포구이기도 하다.

밀레 홍보팀 이광희 대리는 "그동안 중부내륙의 산에 식상한 참가자들의 기분 전환을 위해 호남의 명산을 선물하기로 했다"며 영광행 취지를 밝혔다. 23일 영광 불갑사 주차장엔 전국에서 1천500여 명의 원정대원들이 몰려들었다. 마침 영광군 '불갑산 상사화 축제'와 맞물려 광장은 온통 인파로 붐볐다. 단상에 오른 엄홍길 대장은 "그동안 폭염, 열대야를 이겨내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이제 상사화를 감상하며 맘껏 보상을 받으라"며 농담을 던졌다. 일찍부터 일행을 맞은 김준성 영광군수도 "굴비, 상사화의 고장 영광을 찾아주신 걸 환영한다"며 "불갑산의 좋은 기운과 영광의 멋과 맛을 함께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홍빛 융단 깔아놓은 듯한 '상사화 물결'…불국과 정토가 여기던가

원정대원들이 사찰 진입로에 들어서며 본격 산행은 시작됐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군의 재치 있는 현수막이 관광객들의 웃음코드를 자극한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산 밑으로 상사화 군락지가 물결처럼 펼쳐졌다. 진홍빛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수십만 평의 군락지 풍경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 불국(佛國)과 정토(淨土)가 있다면 이런 경지가 아닐까 싶다. 트레커들은 꽃 앞에서 모두 걸음을 멈춘다. 상사화의 진한 색감이 시신경을 자극하자 절로 탄성이 쏟아진다.

상사화는 꽃이 피고 난 후 잎이 돋는 특성상 꽃과 잎은 한 몸이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이런 숙명 탓에 '비련' '실연'의 노래나 드라마의 소재로 자주 인용된다.

'내가 질 때 그대가 피네, 내가 필 때 그대는 없네'로 시작하는 플로팅 아일랜드 'Floating Island'의 '상사화' 노래 가사는 지금도 여심을 적시고 있다.

연실봉 오르면 바래봉'무등산…남한 마지막 호랑이의 최후도 전해져

불갑산 산행코스는 덫고개~장군봉을 거쳐 연실봉(516m)으로 오른 후 구수재를 거쳐 불갑사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가 주류를 이룬다. 자꾸 달라붙는 상사화의 정염을 털어내며 산객들은 덫고개로 오르기 시작한다. 이 고개엔 사냥과 관련된 씁쓸한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1908년 2월 농민들이 쳐 놓은 덫에 호랑이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마을 주민들의 창에 희생된 호랑이는 일본인에게 팔려간 후 박제로 만들어져 한 학교에 기증됐다. 이 일화는 결국 우리나라 호랑이의 생태, 역사의 최후 기록이 되었다. 즉 남한의 마지막 호랑이였던 것이다.

길은 덫고개 호랑이굴을 지나 정상으로 이어진다. 주봉 연실봉은 호남의 산 중 훌륭한 조망처로 이름이 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은 멀리 지리산 바래봉, 정령치 능선을 볼 수 있고 남쪽으로 무등산 연봉과 서해의 낙조까지 시야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원정대가 오른 날은 연무에 가려 시야가 막혀 있었지만 그 대신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 풍경을 가슴에 담을 수 있었다.

동학농민 수천명 희생됐던 구수재, 그 길 지나면 백제의 종찰 불갑사

연실봉에서 하산길로 접어들어 20분쯤 걸으면 나주로 통하는 길목 구수재가 나온다. 구수재의 옛 명칭은 '멸치'(滅峙). 옛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과 관군의 2차에 걸친 공성전에서 사상자가 3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름대로 '군인들이 전멸한 고개'인데 비극의 지명을 고쳐 지금 이름으로 했다.

완만한 경사길을 30분쯤 지나면 영광의 종찰 불갑사가 나온다.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남중국을 거쳐 백제 땅에 발을 디딘 후 처음으로 세웠다는 절이다. 백제의 법보인 만큼 특별히 예우해 부처 불(佛)에 으뜸 갑(甲) 이름을 받았다. 경내에는 대웅전, 팔상전, 칠성각, 명부전 등 수십 점의 문화재가 전한다. 대웅전의 '꽃문살'은 빠트리면 안 되는 문화재 중 하나. 불갑사를 빠져나오면 또 하나의 이벤트가 기다린다. 불갑지 수면에 비친 꽃무릇의 군무다. 맑은 호수에 일렁이는 빨간 잔영은 연인들의 마음까지 붉게 만든다. 4, 5시간 산행을 마친 원정대는 배낭을 꾸리며 귀가를 준비한다. 일주문 뒤로 상사화 물결은 여전히 붉고 아름답다. 무언가를 두고 온 듯 자꾸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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