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단식의 희화화(戱畵化)

단식은 최후의 투쟁 방법이다. 상대가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한다. 물론 목적 달성이 안 돼도 단식을 중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되는 정치적 내상(內傷)을 감수해야 한다. 심지어 처음부터 '보여주기'를 위한 것이었다는 의심도 받는다. 그런 점에서 단식 끝에 죽는 투쟁가들에서 사람들은 형언할 수 없는 숭고미(崇高美)와 비장미(悲壯美)를 느낀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테렌스 맥스위니의 생애는 그 전형이다. 1913년부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1920년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아일랜드 독립을 내건 단식투쟁 끝에 74일 만에 사망했다. 이는 현재까지 단식투쟁 최장 기록이다.

맥스위니의 단식투쟁은 1980년대 북아일랜드 지하투쟁단체인 IRA(아일랜드공화국군) 조직원들에게 계승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보비 샌즈. 그는 테러 연루 혐의로 체포돼 14년형을 선고받은 뒤 곧바로 자신을 테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인정할 것을 영국 정부에 요구했다. 당시 대처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샌즈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단식을 계속한 끝에 66일 만에 사망했다. 같이 수감된 샌즈의 동료 역시 모두 같은 길을 갔다.

간디도 인도 독립을 내걸고 여러 차례 단식을 했다. 75세 때 21일간 옥중 단식한 것을 포함, 1918년부터 1948년 서거할 때까지 무려 14차례나 된다. 하지만 모두 죽음 또는 그 직전까지는 가지 않았다. 물을 마셨고, 단식 기간도 모두 20일 내외로 조정한 덕분이다.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맥스위니와 샌즈의 단식에 비하면 비장미는 훨씬 떨어져 보인다.

야당 인사들이 내가 5일간 단식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보다 더 많이, 그리고 정자세로 단식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지난 6월 지방재정법 개정 반대를 내걸고 열흘간 단식을 했던 이재명 성남시장은 단식 중에도 업무를 보는 자신과 이 대표의 단식 모습을 비교한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2014년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24일간 단식했던 정청래 전 의원도 "나는…낮에도 눕지 않았다. 누가 다리를 주무르지도 않았다"며 이 대표를 겨냥했다.

과연 이들은 굶어 죽을 각오를 했을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단식을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대표의 단식과 이 시장'정 전 의원 단식은 오십보백보다. 이렇게 한국 정치는 단식마저 희화화(戱畵化)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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