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문학로드, 추억의 대구를 만나다

대구 향촌동의 작은 골목 모퉁이에 일본식으로 세워진 흰색 건물, 2층 다방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시끌벅적하다. 작은 테이블 주위로 빼곡히 앉은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이어지고, 시인 이효상은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수줍게 꽃다발을 건넨 여인은 앳된 얼굴의 여류 시인 오난숙이다. 그들의 뒤편에서 서예가 죽농 서동균과 담배를 입에 문 공초 오상순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이호우가 있고, 이윤수와 조지훈, 구상도 보인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젊은 시인 신동집과 김요섭도 자리하고 있다. 1951년 7월의 어느 여름날, 한솔 이효상의 시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모나미다방은 많은 시인들과 예술인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1950년대 향촌동 거리는 곳곳마다 다방과 술집이 있었다. 번화가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음악과 술에 취해 예술을 이야기하며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전쟁 중에 어떻게 그런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일까?

6월 25일, 한국전쟁의 총성을 피해 남하(南下)하던 피란민들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으로 안전하다 여긴 대구와 부산으로 향했다. 전쟁의 참화와 모진 고난을 감내하고 도착한 사람들은 향촌동 인근으로 몰려들었고, 그중에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문화예술인도 많이 있었다. 절망과 가난으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이었지만 피란의 와중에도 문학과 예술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향촌동 골목 다방에 모여 매일 밤 전쟁의 분노를 토로했고, 음악으로 허무한 마음을 달랬다. 애통한 현실은 그림으로 그려졌고, 비장한 애국심은 한 편의 시로 탄생했다. 대구의 근대문학과 예술은 그렇게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그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골목을 걷다 보니 숨어있는 이야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창동은 이상화 가족과 시인 이설주, 신동집 등 여러 문인이 태어난 동네이며, 인근에 있던 '수창보통학교'는 한국 근대미술의 거장인 이인성과 이쾌대가 졸업한 학교다. 이상화의 백부인 이일우 선생은 '우현서루'(友弦書樓)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인재를 양성했고, 이곳은 현재의 대륜고등학교로 이어진다.

민족시인 이상화를 기리기 위해 시인 이윤수와 김소운이 '상화시비' 건립을 논하고 동인지 '죽순'을 발간했던 '명금당'도 있다. '무영당'이란 이름의 백화점에서는 전시회와 음악회를 개최하며 윤복진, 박태준, 이응창, 백기만 등 많은 문화예술인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꽃자리다방, 백조다방, 호수다방, 르네상스…. 다방마다 재미난 이야기도 즐비하다.

대구문학관은 이런 이야기들을 모아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문학과 문인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문학관광 프로그램 '대구문학로드'를 새롭게 만들었다. 근대문학의 탄생 배경과 흐름을 살펴보고, 여러 문인들이 살고 교류했던 그 시절을 전문 해설사의 실감 나는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대구문학로드는 수창동에서 계산동까지 탐방하며 근대문인들의 생가와 고택을 따라 걷는 A코스와 대구문학관과 향촌동, 북성로를 중심으로 문학예술인의 교류 흔적을 찾아보는 B코스 두 가지로 나뉘어 있으니 선택하여 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시인'은 떠났으나 시는 남아 우리와 함께한다. 한 편의 시를 쓰는 것이 첫 번째 창작이라면, 그 시를 읽는 것은 두 번째 창작이다. 문인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음으로써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난 그들을 오늘로 호출할 수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