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사만어 世事萬語] 기러기, 기레기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동요 '기러기')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러기를 아주 좋아했다. V자 대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들을 보며 사람들은 의로움과 정겨움을 느꼈다. 기러기들은 비행 중 가장 힘든 역할을 대장이 맡는다. 앞 기러기들의 날갯짓으로 생기는 공기 흐름 덕분에 뒤 기러기들은 덜 힘들게 날 수 있다. 선두가 지치면 다음 힘센 녀석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기러기들은 또한 겨울에 우리나라에 왔다가 봄이되면 북쪽으로 날아가는 습성 때문에 먼 곳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도 인식됐다.

제주도 방언에서는 기러기가 '기레기'로 발음된다. 공교롭게도 이 방언과 발음이 같은 '새'(?)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기자'와 '쓰레기'를 합친 신조어 '기레기'이다. 기레기는 전문성 부재와 편파성 등으로 저널리즘의 위상을 깎아 먹는 기자와 그 사회적 현상을 조롱하는 말이다. 기러기는 사랑받지만 기레기는 대중들의 미움을 잔뜩 받고 있다. 언론계 종사자들로서는 이만큼 자괴한 용어도 없다.

기자 집단 전체가 기레기로 싸잡아 비난받는 데에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지만, 반성해야 할 이유가 더 크게 다가온다. 기자는 누구보다도 높은 윤리의식과 사명감을 숙명적으로 지녀야 하는데, 민주화로 얻어진 언론 자유와 그에 걸맞은 책임을 우리 언론들이 제대로 수행했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지나친 속보 경쟁으로 오보를 남발하거나 황색 저널리즘에 매몰됐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권력과 시장(市場)에 아부하거나 심지어 스스로 권력이라는 착각에 빠진 언론사가 없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최근 발효된 속칭 김영란법은 깊은 화두를 언론계에 던져주고 있다. 김영란법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확인된 국민 신뢰도는 처참한 수준이다. 이 법에 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은 기사에는 여지없이 '얼마나 얻어 먹었길래…'라는 식의 비난 댓글이 폭주한다. 김영란법은 기자 등 공직자들에게 유례없이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요구한다. 법조항 및 유권해석의 애매모호함 때문에 논란이 없지 않지만, 기자들이 법 취지대로 직분에 임한다면 국민들로부터 욕먹을 일은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역설적으로 김영란법은 언론이 국민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기자들이 국민들로부터 기러기처럼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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