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하나 바라보며 평생을
하금연 할머니를 찾았다. 생후 3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평생을 수절한 여인이다. 방문했을 때 아들 윤성열과 함께 반갑게 맞아주었다. 윤성열은 나와 동갑이다. 사건 이야기를 들먹이니 깊게 팬 주름에 눈물이 번졌다.
"나이 열여덟에 결혼했어. 결혼하고 일 년을 묵혀 시집을 갔지. 음력 10월 15일, 시집갈 날을 받아놓고 있었어. 사건이 터진 다음 날, 신랑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어. 날벼락 같은 소리를 듣고 억장이 무너지더군." 꿀꺽 울음을 삼킨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바로 시집에 가셨나요?"
"친정아버지는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더군. 그러나 우짜겠노? 신랑이 죽었으니 상주 노릇은 해야지. 친정엄마가 성열이를 업고 아버지와 함께 시가에 갔어. 남편은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더군. 상주인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 다른 사람은 바로 장례를 치렀지만, 우리 영감은 삼일장을 치른 셈이야."
"어린아이를 데리고 무척 힘들었겠군요?"
"말로 다할 수 없어. 소설을 써도 몇 권 쓸 거야. 남편은 새집을 짓고자 기둥과 서까래를 모두 장만해 놓았지. 신접살림을 꾸려 보겠다는 꿈은 물거품이 되었어. 좁은 큰집에 열두 명이 살았지. 눈치가 보여 못 살겠더라고. 그를 본 사촌 동서(남계선)가 허름한 방을 구해 줬어. 나를 자주 불러 밥도 먹게 하고. 그 형님도 사건에 남편을 잃었어. 방을 얻어 살림을 차릴 때, 큰집에서 보리쌀 한 말, 땔감 몇 단이 전부였어.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고 두 해 동안 심한 흉년이 들었지. 조밥을 지었는데, 까끄라버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더군. 깊은 산에는 무서워서 못 가고 가까운 강가에서 잡풀을 베어 땔감으로 사용했어."
"시집살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군요?"
"시부모보다 시아주버님 시집을 혹독하게 살았어. 짚을 태우고 난 뒤, 남은 불씨를 단도리 제대로 못 했다며 한나절 동안 잔소리를 하는 거야. 너무 서러워 무작정 친정으로 도망쳐 왔지. 남의 눈에 띌까 봐 어둑할 무렵 친정에 들어갔어. 일 년 뒤쯤이야. 둘째 시아주버님이 이렇게 말했어."
"집을 지어 우리 가족과 함께 살자. 조카가 크면 제수씨에게 집을 주겠다"고 하더군. 그것도 흐지부지되었어.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친정아버지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같이 살자"며 친정에 데려갔어.
"그 뒤의 생활은요?"
"대구에 사는 고종사촌 주선으로 과자 공장에 취직했지. 사탕과 과자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잡일까지 시키더군. 밥도 하고, 서답 빨래 함경도 방언도 씻고 식모 노릇 마찬가지야.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베 짜는 공장에 취직을 시켜줬어. 아는 언니와 판잣집 단칸방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할 때였지. 친정어머니가 아들을 데려가라고 하더군. 또래인 올케 아들과 자주 싸웠던 모양이야. 아들을 데리고 나올 때, 눈물이 얼마나 쏟아지던지….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할 골방에 세 명이 살았어. 친구와 더불어 밤낮을 교대하며 공장에 다녔지. 번갈아가며 아들을 키웠어. 봉급도 제때 나오지 않더라고. 하는 수 없이 도시 생활을 접고, 친정 곳에 뿌리를 내렸어. 아들이 열심히 일한 덕에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어."
아들 윤성열의 말이다.
"네 살쯤 되었을 거야. 배가 너무 고파 이웃집 쌀독에서 쌀을 몰래 퍼먹다 들켰어. 팔이 닿지 않아 검정 고무신을 거꾸로 잡고 쌀을 퍼냈지. 주인이 엄마에게 일러바쳤을 때, 엄마의 일그러진 모습을 여태 잊을 수가 없어. 엄마는 때리지 않았으나 사촌 누나에게 호되게 맞았어."
#25. 사망자 윤재만 25세. 아내 하금연 19세. 현 87세
아들 윤성열. 생후 삼 개월. 영천시 화산면
장가도 들지 못한 채
총각이었다. 물론 후손도 없다. 집은 질구디였다. 하장술 집의 고용인이었다. 주인집, 아래채 사랑방은 머슴과 또래 일꾼들이 놀았던 장소이다. 놈들이 지목한 그곳에는 공비들이 직접 쳐들어갔다. 일부는 논 마당에 끌고 갔고, 도망칠 기미가 보이는 몇 사람은 현장에서 처형했다. 집주인도 그날 변을 당했다. 지주로 지목되어 공비들이 노리고 있었을 터다.
일가친지가 없어 자세한 상황을 듣기 어려웠다. 나이 지긋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전부이다. 그의 가족 관계를 밝히고자 노력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돌아가신 분은 생활의 터전을 마련코자 이곳저곳을 떠돌다 박사리에 삶의 터전을 잡았을 터이다. 그의 형은 꼽추였다. 엿판을 지게에 얹어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엿을 팔았다. 더는 추적할 단서를 찾지 못해 취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26. 이동식 22세. 증언 최금택 박사리
머슴살이한 형제는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죽었다.
이경조는 갓 결혼하여 추동 할머니 집에서 신접살림을 꾸렸다. 머슴살이하였지만, 부부 금실이 좋았다. 그는 바로 집 앞 논에서 피해를 보았다. 아들 한 명을 두었지만,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 아내는 바로 재혼했다.
같은 날 죽은 이해봉은 이경조의 동생이다. 와촌면장을 지낸 황영식의 집에서 머슴살이했다. 집은 서당각단이다. 역시 논 마당에 끌려와 죽임을 당하였다. 그에게는 후손이 없다. 박사 사건에 형제가 죽은 가정이 둘이다. 그 가운데 한 가정이다.
구미에 사는 조카 이대중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용을 전혀 몰라요. 다만 삼촌 두 분이 사건 때 돌아가셨다는 말만 들었어요. 산소는 우리가 벌초를 해왔어요."
위령비에 새겨진 희생자 명단에는 이경조로 표기되었다. 호적부에는 이영조이다.
#27~28. 사망자 이경조, 사망자 이해봉. 형제 사이임
증언 최금택 박사리. 조카 이대중 구미시
무공훈장에 빛나는 참전 용사
골짜기에서 연세 높은 어른을 찾았다. 전후 사정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어른은 나이보다 정정했다. 자전거를 타고 십여 리 떨어진 경로당에 출입한다. 6'25 참전 용사이다. 권총을 찬 늠름한 모습과 훈장이 벽면에 걸려 있다. 그분은 신한리에 산다.
"어르신, 밖에서 바라본 박사 사건 상황이 어땠는지요?"
"시국이 뒤숭숭했어. 공비들이 자주 내려와 해코지를 많이 했어. 우리 마을도 많이 시달렸어. 나는 그날 저녁, 신건리 자연부락 이름에서 놀고 있었지. 갑자기 박사리가 대낮같이 밝아오더라고. 불을 끄려고 박사리에 내려갈 엄두를 못 냈어. 그날 죽은 이해봉과 이경조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 우리 마을에 살았어. 먹고살기 어려워 그곳에서 머슴을 살았지. 사건이 터진 다음 날 아침, 그들의 형인 이두칠로부터 연락이 왔어. 두 동생이 공비들에게 참변을 당했다고. 친구 몇 사람과 함께 박사리에 내려갔어."
"어르신은 그분들과 어떤 사이였는지요?"
"맏이인 이두칠과는 상포계를 같이했어. 죽은 두 형제를 구룸마로 옮겨 큰골에 묻었어. 그들의 조카가 묘를 관리했어. 조카는 이이칠의 아들이야. 묘가 건설 현장에 들어가 버렸으니 조카의 발걸음도 뜸하겠지."
그들의 4형제 중 둘째가 이이칠 어른이다. 명절'단오'화전놀이에 풍물을 치고 놀 때면 단골 구성원이다. 설부터 보름 전후로 집집이 다니며 지신을 밟았다. 귀신을 쫓아내는 포수역을 이이칠 어른이 맡았다. 작은 체구에 작대기 총을 어깨에 메고 사격 자세를 취할 때면 구경꾼은 폭소를 터뜨렸다. 얄궂은 모자를 쓰고 숯으로 턱수염을 팔자로 그린 분장은 익살스럽기 그지없었다. 신명이 잡혀 얼쑤~ 어깨춤은 명품 예술이었다.
이웃 주민 김수찬. 1927년생. 신한리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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