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계의 창] 재벌과 권력

경북대(석사)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원하면 원숭이라도 대통령 만들어"

러 대선서 옐친에 돈줄 댄 재벌 공언

20여년 자본주의 역사 돈·권력 유착

천혜 자원 부국이지만 국민은 가난

최근 러시아 경제개발부 장관 울류카예프가 굴지의 석유회사에 200만달러의 뇌물을 요구한 것이 감청되어 해임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체포된 관료로는 가장 높은 지위로, 가택에 연금되어 향후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력과 재벌의 유착 관계는 러시아에선 공공연한 비밀인데다, 액수도 '껌값'에 불과하기에 정치공작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고 옐친을 대통령으로 러시아 공화국이 출범했을 때만 해도 러시아 국민들은 자본주의만 시행되면 자신들도 서방처럼 잘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비록 국민들은 가난했지만 막대한 영토에 풍부한 석유, 천연가스, 지하자원을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러시아니 그런 꿈을 꿀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돈이 뭔지, 사고파는 게 뭔지도 몰랐던 국민들이 어영부영하는 사이 소수의 사람들이 막대한 국유 자원을 발 빠르게 사유화했다. 옐친이 헐값에 팔아넘긴 석유회사와 가스회사는 몇몇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서 우리의 재벌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자산을 가진 과두재벌 '올리가르흐'가 나타났다. 이들은 옐친 권력에 뒷돈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정치에 나서는 등 정경유착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

가장 유명한 올리가르흐로는 옐친의 돈주머니로 알려진 베레조프스키와 푸틴의 눈 밖에 나 10년이나 옥살이를 한 호도르코프스키, 그리고 영국의 명문 축구 구단 첼시의 구단주로 잘 알려진 아브라모비치가 있다.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을 보면 정치와 재벌의 유착이 어떻게 종결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셋 중 가장 연장자였던 베레조프스키는 1996년 옐친이 대통령에 재선되도록 거액의 정치자금을 대고, 직접 나서서 총리를 실각시키기도 했다. "내가 원하면 원숭이라도 대통령을 만들 수 있다"는 유명한 말은 당시 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올리가르흐는 이처럼 돈과 언론, 그리고 마피아까지 이용해서 국가를 쥐락펴락했으며, 권력자들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였다. 옐친의 정치적 몰락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올리가르흐 '패밀리' 조직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푸틴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이들은 위기를 맞게 된다. 부패척결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실은 올리가르흐들의 과도한 권력을 경계했던 푸틴은 재빠르고 무자비하게 이들을 정리했다. 베레조프스키는 헐값에 재산을 처분하고 영국으로 망명을 했고, 2013년 석연치 않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러시아 최대 석유회사 유코스 사장 호도르코프스키는 탈세 혐의로 체포되어 10년간 옥살이를 하다 2013년에야 석방되어 유럽에서 살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다른 죄목을 씌워 다시 그를 수배했지만, 서방에서는 이를 정치 공작으로 일축하면서 그를 보호하고 있다. 아브라모비치는 재빠른 처세로 살아남았지만 스포츠 및 지방 재정 지원을 통해 푸틴의 비위를 맞추면서 여전히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20여 년 짧은 러시아 자본주의 역사는 돈과 권력이 어떻게 유착되고 상호 배제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돈을 가진 자들은 이를 지키기 위해 정권과 결탁하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쥐려고 한다. 권력은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재벌과 유착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권력은 자본이 돈 이상의 것, 자신들의 권위를 넘볼 때는 가차 없이 이를 제거한다. 권력과 자본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보완하고 빼앗을 따름으로, 한 번도 이를 국민과 나누지 않았다. 그리하여 가장 넓은 영토와 천혜의 자원을 지닌 부국의 국민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그 모양과 정도만 다를 뿐 우리나라도 유사한 상황이다. 재벌들이 대통령, 아니 그 그림자에도 벌벌 기면서 수상한 재단 창설과 사업을 위해 돈을 갹출한 것을 보면 말이다. 권력 유지에 돈이 필요한 것인지, 돈을 유지하는 데 권력이 필수적인 것인지,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는 서민들은 여전히 아리송할 따름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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