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서스펜디드 커피

한 장밖에 남지 않은 달력이 몸과 마음을 바쁘게 만든다. 나무들은 서둘러 잎을 떨어뜨리고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가 그리운 시기다. 무심코 입에 대는 차 한 잔에 세상과 내 주변이 바뀐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는 것도 이 무렵이다.

'서스펜디드 커피'(Suspended Coffee)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한 잔의 커피조차 버거운 이들을 위해 미리 돈을 내고 맡겨두는 커피다. 누군가의 찻값을 미리 치르는 일종의 기부로 '펜딩(Pending) 커피'라고도 한다. 누구든 카페를 찾아 서스펜디드 커피가 있는지 묻고 무료로 마실 수 있는 나눔의 커피인 셈이다.

서스펜디드 커피는 100년 전 이탈리아 나폴리의 서민층에서 '카페 소스페소'라는 이름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2차대전 후 경제 부흥기 때 자취를 감췄다가 세계 금융 위기와 유로존 경제 위기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2010년 12월 세계 인권의 날을 맞아 '서스펜디드 커피 네트워크'라는 사회연대가 결성되고, 2013년 아일랜드에서 존 스위니가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글로벌 사회운동으로 확산됐다.

커피뿐 아니라 다른 음식 기부운동으로 번져 캐나다에서는 서스펜디드 밀(meal)까지 등장했다. 이런 활동이 알려지면서 국내에도 서스펜디드 커피재단이 생겼다. 어려운 이웃의 고단한 삶을 녹여주는 한 잔의 커피가 한 세기 동안 식지 않고 이어진 원동력은 공동체를 향한 희망과 기대, 인간의 정과 선한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달부터 각종 사회구호단체가 이웃사랑 캠페인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구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72일간의 '희망2017나눔캠페인'을 시작했고, 구세군 자선냄비도 거리에 등장했다. 특히 공동모금회의 '사랑의 온도탑'은 시민의 큰 관심사다. 본지도 매일 사랑의 온도를 지면에 공지하는데 29일 기준 대구가 6.9도, 경북은 2.5도, 전국 3.7도를 기록했다. 올해 목표액은 대구 72억3천만원, 경북 134억7천만원, 국내 전체 3천588억원이지만 경기 침체와 어수선한 시국 탓에 온정의 손길이 줄지 않을지 걱정이 크다.

매일 조금씩 사랑의 온도가 오르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열매가 온전히 열리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주목할 것은 서스펜디드 커피가 되살아난 시기적 배경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 시선은 자신을 넘어섰고 배려심은 더 커졌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자 미덕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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