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은퇴 없는 삶을 위하여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은퇴를 하지 않을 작정이다. '은퇴 후 미래'는 중년 이상 지인들과의 이야기에서 늘 빠지지 않는 주제다.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은퇴 후 미래에 대해 불안해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다. 아무도 은퇴를 강요하지 않는 자유업을 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고객이 없더라도 혼자서 옷을 만드는 즐거움으로 살아갈 생각이다. 연금도 퇴직금도 없는 프리랜서로 살면서 호기롭게 말할 수 있다. 1년에 단 한 벌의 주문이 있더라도 그 옷을 즐거이 만들어 줄 수 있을 때까지 일하겠다고.

눈이 침침해져 재단선이 흔들리기도 하겠지만, 수십 년 경험한 노하우가 있으니 두 배, 세 배, 열 배의 시간을 들이면서라도 나처럼 늙어가는 미싱사들과 막걸리 한잔 기울이며 공들여 옷을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많진 않겠지만,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디자인 펜과 재단 가위는 늘 내 몸 가까이에 둘 작정이다. 물론 추운 겨울날 공연장에서 나오며 콜택시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미리 좀 벌어둬야 하겠지만 말이다.

청년실업은 매년 이슈인데 봉제공장에는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 라인 작업이라 하여 자동화 및 컴퓨터화 추세에 사람이 점점 부품으로밖에 쓰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이 현장엔 꼭 있기 마련인데도 말이다.

대학 패션디자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국내외 콘테스트에서 화려한 상도 무수히 탄 친구들이 하이패션 브랜드에서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패션업계와 등을 돌리는 경우도 많이 봤다. 자신은 일류 디자이너라는 자부심을 떨칠 수가 없는데, 몇 년을 동대문시장에서 단추 같은 부자재만 다루고, 택배기사 노릇만 해야 하는 처지를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가. 30여 년 전 어깨가 무너질 듯이 무거운 원단과 샘플 보따리를 들고 8월 염천 더위에 버스를 세 번씩이나 갈아타고 가봉을 간 집에서 뜨거운 콜라를 얻어 마시던 그 시절에도 나는 꿈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 내게 어찌 은퇴를 상상하라는 말인가.

누군가 나이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 했다. 하지만 오늘 하루만 입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장 안정된 직장과 눈앞의 이익을 좇지 말고,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 40, 50년 뒤의 삶 속에서 나 자신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뭔지를 생각하며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나아가 입만으로 살아갈 생각보다는 내 몸을 아끼지 말며 기능인, 나아가 기술인, 더 나아가 예술인으로 평생 은퇴 없이 삶을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권하고 싶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은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것이면 최소한의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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