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개그콘서트의 프로 '감수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랑캐가 쳐들어와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이 모두 함락되고, 남은 것은 하나, 감수성뿐. 그런데 이 감수성의 장수들은 감수성이 풍부했으니."
오랑캐가 쳐들어왔다고 걱정하는 왕에게 신하들은 퇴각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왕이 말한다. "다시 퇴각이란 말을 꺼내면 3대를 멸할 것이다." 그러자 이 말에 옆에 있던 내시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입을 연다. "제가 3대가 어딨어요." 다른 신하들도 거든다. "3대를 멸하다니, 그게 사람한테 할 소리야?" 왕은 금방 사과한다.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어." '감수성'은 이렇듯 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받은 신하들의 반응이 웃음을 유발한다.
'감수성'은 그저 개그 프로지만, 우리나라에는 실제로 감수성이 엄청 민감한 집단이 있다. 바로 새누리당 국회의원들로, 왕에 필적하는 권력을 지닌 박근혜 대통령의 한마디마다 감격해 마지않는다. 남이 써준 원고를 후다닥 읽고, 질의응답은 받지도 않는 담화에 도대체 무슨 감동이 있다는 것일까? 게다가 그 내용도 자기반성은커녕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과 거짓말로 점철돼 있으니 그들의 과잉 반응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는 유행어를 낳은 2차 대국민 담화를 보자. 대통령 자신도 엄연히 공범임에도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다"라며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1차 담화 때 했던 "연설문 작성에서 최 씨의 도움을 받았고, 보좌진이 완비된 뒤에는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발언이나 2차 담화 때 했던 "검찰 조사와 특검 수사를 받겠다"는 약속도 오래지 않아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새누리당 의원들, 특히 친박 의원들은 담화 때마다 감동의 물결에 휩싸인다. 당 대표인 이정현은 2차 담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하니, 이 정도면 감수성의 화신이라 할 10대 소녀를 능가한다.
희한하게도 이들의 감수성은 대통령을 바라볼 때만 발휘된다. 전 세계가 감동해 마지않는 촛불집회를 보자. 춥디추운 12월에 100만이 넘는 인파가 광화문에 모여 촛불을 드는 것도 감동적이지만, 그들이 집회 내내 보여준 평화에의 갈망은 그저 가슴이 뭉클하다. 촛불집회가 행여 폭력 시위로 매도될까 두려운 나머지 경찰을 안아주고, 경찰 버스에 붙은 스티커를 떼주고, 시위가 끝난 뒤 남은 쓰레기를 다 치우는 시민들, 2차 담화를 보며 펑펑 울었을 만큼 감수성이 풍부하다면, 촛불집회를 본 뒤엔 눈물이 강을 이뤄야 맞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이정현은 촛불집회에 대해 마뜩잖은 시선을 보내며, 친박의 핵심인 김진태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라고 말한다. 촛불에 실린 간절한 민심을 외면한 채 "초값은 누가 대주는 것이냐?" 같은 음모론을 유포하기 바쁜 이들을 보면 감수성도 이렇게 선택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런 국회의원들의 존재는 국회 전체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6일 시작된 국정조사에서 우병우와 최순실을 비롯한 국정 농단의 핵심 인물들은 국회 출석을 거부하고 있다. 우병우는 출석요구서를 받지 않으려 가출했고, 최순실은 평생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는 '공황장애'(?)를 이유로 출석을 거부했다. 심지어 유치원 학부모 모임이 있다며 출석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자녀가 볼까 봐 못 나가겠단다. 어쩌다 나오는 증인들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데, 국회의 권위가 존중받고 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으리라. 개콘 '감수성'에서 왕과 신하들은 계속 말꼬리만 물고 늘어지느라 오랑캐와 싸우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새누리당 역시 대통령에게 풍부한 감수성을 선보이기만 할 뿐 국민의 뜻을 받드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작금의 정국 혼란에 새누리당의 책임이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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