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나는 희망을 읽으려 애쓴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제2회 백만원고료 한국문학 신인상. 전 경희대 법대 겸임교수. 전 자유경제원 원장

반 전 총장의 자진 낙마 사태

보수의 금 간 담장 확실히 괴멸

오랫동안 재건도 쉽지 않을 것

그러나 동 트기 전 가장 어두워

보수는 마침내 무너진 것인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낙마했다. 대선 레이스를 포기한 것이지만 어쨌든 낙마다. 그를 보수 후보로 믿었던 이들의 낙담이 깊다. 올망졸망한 후보들이 출사표를 냈지만 미덥지 않다. 황교안 총리 대망론은 무난히 지는 방법이라는 자탄이 나온다. 20일 전만 하더라도 반 전 총장은 금의환향하는 '소년 영웅' 같았다. '유엔의 대통령'이었다는 자만심마저 엿보였다. 모든 채널이 생중계하는 입국 장면에서 그는 준비한 멘트를 쏟아냈다. 하나는 '진보적 보수'라는 생경(生硬)한 언어로 조합된 정체성이었고 또 하나는 '정치 교체를 하겠다'는 화두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반 전 총장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는 대선 포기를 선언하면서 그를 음해하는 언론과 말을 바꾼 '정치꾼'들을 비난했지만 그건 정치를 전혀 모르는 소치에서 나온 변명에 불과하다.

사실 반 전 총장은 뉴욕에서 많은 준비를 해온 듯 보였다. 유력 정치인들이 뉴욕에 들락거리면서 그를 어떻게 부추겼는지 모르겠지만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다. '정치 교체'라는 화두는 선두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내건 '정권 교체'를 압도하기 위해 준비했을 것이다. 설명이 쉽지 않은 그 화두로 그는 대한민국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식상할 대로 식상한 '새 정치'란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진보적 보수'라는 말은 그런 낙관에서 나왔다. 그는 진보에 맞설 유일한 대항마로 꼽혀왔으니 보수는 당연히 집토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보수 진보 모자 둘 다 써서 적당히 소외층에게 손짓해 외연을 넓히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낙관론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오판이었다. 정치판을 읽는 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반 전 총장이 서울에서 첫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진보적 보수라고 한 말이 결국 치명적 독이었다. 그 말로 인해 '보수'는 집토끼가 아니라 반 전 총장이 전혀 모르는 산토끼가 됐다. 말 한마디로 만든 놀라운 위치 이동이었다. 그는 노무현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을 했고 외교통상부장관을 지냈으며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게 아니었던가. 아마도 박근혜 대통령의 몰락이 그 자신이 보수 주자로만 묶이는 걸 망설이게 했을 것이다. 그동안 그를 보수 주자로 여기게끔 했던 몇 건의 가십들, 예컨대 국제회의에서 박 대통령과 수차례 조우하면서 친근한 모습을 연출한 것이라든가 과거 친박들이 그를 차기 주자로 영입한다고 설레발을 친 것이 외려 짐이 됐을 것이다. 그는 기자들에게 "표를 얻으려면 보수라고 확실하게 말하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면서 "보수의 소모품이 되라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고 타박했다. 말하자면 그는 스스로 보수 후보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가 가장 주목받았던, 귀국 후 황금 같은 며칠을 엉뚱하게 날려버리는 모습이다. 공항철도를 타는 서민 코스프레부터 전국을 누비던 행적은 차라리 희극적(喜劇的)이라고 해야 맞다. 그는 그 시간에 정면 대결을 벌였어야 했다. 정말 이 나라의 정치를 바꾸고 싶었다면 빅 텐트를 치려 여기저기 곁눈질하지 말고, 몇 사람이 새누리당을 탈당해 자신에게 줄을 설까 재보지 말고 정공법을 써야 했다. 대중에게 국가의 기틀을 새로 세우자고 호소해야 했다. 공항에서 자신을 불사를 수 있다고 호언한 것에 걸맞게 첫날부터 열정과 헌신을 대중에게 선보였어야 했다. 그것이 곧 정치 교체일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그가 한 건 다른 후보들이 해온 것과 같은 구태의연한 행동뿐이었다. 그러니 '보수'는 그를 떠났다. 그건 그가 울화를 삭이면서 섭섭함을 드러낸, '가짜 뉴스' 같은 공격 때문이 아니었고 '이기주의적 태도'라고 힐난한 정치인들 때문도 아니었다. 그건 오롯이 반 전 총장의 잘못 때문이다.

어떻든 반 전 총장의 자진 낙마로 이제 제3지대에 친다던 빅 텐트는 물 건너갔다. 언론은 '문재인 독주'를 대세론으로 포장하기 바쁘다. 상대를 잃은 문재인의 독주가 독이 될지 어떨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이 나라 보수의 괴멸(壞滅)이다. 보수의 금 간 담장을 반 전 총장은 확실히 허물어 버렸다. 아마 재건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오랫동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가장 어두울 때가 동트기 전이라는 건 모두가 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희망을 읽으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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