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영민의 에세이 산책] 책에 대한 존경

언제나 아버지는 생일선물로 전집을 사다주셨다. 1학년 생일에 받은 책은 한국편 32권, 외국편 32권으로 구성된 금성사 '소년소녀위인전기'였다. 2학년 생일에는 70권짜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받았다. 선물이라 좋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아, 이걸 다 언제 읽나' 그런 생각뿐이었다. 생일 때마다 전집이 생겼지만 당연히 수백 권에 이르는 책을 다 읽지 못했다. 그중에선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것도 있는데, 바로 4학년 때 받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라는 28권짜리 전집이었다.

이 책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께서 내 생일 한 주 전 전집류를 주로 취급하는 외판원을 집으로 부르셨다. 아저씨는 여러 상품 중 유독 이 전집을 권했다. 좀 비싸더라도 아이가 평생 보게 될 책이라며 영국과 미국의 무슨 책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마도 '브리태니커 사전', '아메리카나 사전'이었던 것 같다. 일찍 학업을 중단하신 아버지도 무슨 책인지 모르는 눈치였지만 매년 거래해오던 외판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으셨고, 결국 책이 배달되었다. 책은 이전에 나로선 한 번도 보지 못한 크기, 두께였고 벽돌보다도 무거웠다. 아버지는 집에 막 도착한 책을 책장 한쪽에 한 권씩 꽂아 넣었다. 책장은 무겁고 짙은 고동색으로 채워졌다.

내게 책에 대한 '원체험'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책들을 아버지와 함께 책장에 꽂아 넣은 그날의 경험이었다. 집에는 늘 책이 있었고, 매일 책을 읽었지만 이 백과사전이 들어온 그날부터 다른 책들은 책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도 손길이 가지 않았지만 나는 '권위적인' 책을 바라보며 "내가 어려서 읽을 수 없을 뿐 저 책엔 아마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비싼 전집에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욕심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본인은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책에 대한 경외와 존경도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우리 부모님들은 그런 믿음을 가진 세대였을 것이다.

지금도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 더 많지만, 책장의 책들은 단지 존재만으로도 내가 인간의 지적 유산에 대한 동경을 키우도록, 때로는 내게 책을 더 읽도록 해주는 압력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이 계몽사상가들이 만든 '백과사전'이 있었기에 촉발되었다지만 혁명을 주도하던 이들이 백과사전을 다 읽었을 리 없다. 대신 '책에 대한 존경'이 '왕에 대한 존경'을 이길 때 변화가 일어났다. 아버지보다 두 배는 더 많은 시간 책을 읽었겠지만 나는 아버지만큼 책을 존경하고 있을까? 책에 대한 존경은 단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이 우주 속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는 그 순간 생겨난다. 짙은 고동색 백과사전 전집이 어린 내겐 그 우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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