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문학노트]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김윤아, '봄날은 간다' 부분)

촉촉하게 봄비가 내렸다. 빗물로 흐려지는 창을 내다보는데 문득 하얀 벚꽃에 빗방울이 튕기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이고,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라고 어느 여류 시인은 말했다. 빗방울에 조금씩 젖어가는 벚꽃에게 은근히 질투를 느끼면서 이젠 어떤 빗방울에도 쉽게 젖지 않는 나를 거울을 통해 지켜본다. 제법 많아진 눈가 주름, 이젠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숫자가 늘어난 하얀 머리카락, 그런대로 눈물처럼 맑고 초롱초롱하던 눈빛조차 시들어가는 지친 얼굴이 거기에 보였다. 봄날은 가고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지만 돌아갈 수 없는 풍경만을 만드는 우리네 삶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렇게 벚꽃은 밤새 비에 젖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창가에는 여전히 소리 없이 비가 내렸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창문을 열었다. 밤새 젖은 벚꽃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젖어 있던 벚꽃이 언제 마음을 말렸는지 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눈송이처럼 꽃잎을 날렸다. 날리는 벚꽃가지 사이에 여전히 남아 있는 꽃잎들이 보였다. 떠나는 꽃잎과 남아 있는 꽃잎. 그 사이에 내가 머문다. 날리는 꽃잎과 머물러 있는 꽃잎 그 사이에 내 마음이 머문다. 수없이 떠나갔고, 떠나고, 떠날 내 삶의 꽃잎들. 그리고 여전히 여기에 머무는 내 삶. 이젠 어떤 이별에도 나는 익숙하다. 어떤 이별에도 쉽게 젖지 않는다. 익숙한 이별, 그리고 맛있는 슬픔. 그렇게 떠난 이별과 슬픔들이 어느 마음 가지에 머물고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바람에 벚꽃이 날리고 있다.

4월도 이미 깊었다. 젊은 시절과는 달리 시간이 빠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지친 봄빛이 가볍게 날린다. 바람도 좋고, 봄빛도 좋다. 발길을 멈추게 하고, 피를 흘리게 했던 수많은 돌멩이도 이제는 오히려 익숙하고 정겹다. 겨울을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겨울이 지닌 차가움과 쓸쓸함, 그리고 따스함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사랑했다. 나이가 들면서 겨울만이 아니라 가을도, 여름도, 오늘 같은 봄도 좋다. 마음이 마음 안에 깊이 누워 지낸 겨울은 이제 저만치 멀어졌다. 벚꽃이 막바지다. 그래도 슬프지 않은 건 시간이 흐르면 다시 필 것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 슬픈 사람, 쓸쓸한 사람, 무너진 사람, 추운 사람, 피곤한 사람…. 그들을 위해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를 내려놓는다.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금방 떠난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을까? 참, 맛있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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