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왔어?"
권종성이 후루쇼와 감옥으로 갔던 그때 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서요가 꿩 사육장을 빠져나오면서 소리쳤다. 서요는 노란 여우 모피로 된 원통형 러시아 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리우찌 모자를 쓴 후루쇼는 사복 차림이었다.
"날씨가 추워요. 오다가 입안의 침이 다 얼었죠."
권종성은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오게 하느냐는 불평 섞인 농담을 했다. 후루쇼가 피식 웃었다. 그러곤 권총을 건네받으며 서요를 위로했다.
"피스톨로 꿩을 맞추는 게 결코 간단하지 않아요. 저놈들이 워낙 예민해요."
아까는 눈에 띄지 않았는데 후루쇼 뒤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키가 무척 작고 몸매가 탄탄한 일본인이었다. 서요가 그래도 아쉽다는 듯 사육장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솜씨가 모자란 거예요. 권형에게 선물하려고 몇 놈 더 잡았으면 했는데 말이오."
"두 마리면 실큰 먹죠. 방으로 들어갑시다."
현관을 들어서자 실내가 훈훈했다. 홀에는 일인들의 취향에 맞게 창을 따라가며 고무나무와 세베리아, 난초가 즐비했다. 페치카에서 흘러나오는 열기와 식물들이 뿜는 습기로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홀에 다른 손님이 없었지만 넷은 긴 복도를 걸어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여급이 들어와 서요의 외투와 사프카 모자를 벗겨 주었고, 후루쇼에게 권총이 든 웃옷을 받으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여관 주인이 서요와 꿩 요리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자리를 떴다. 나중에 들어온 기모노를 입은 다른 여급이 잔에 우롱차를 따랐다. 권종성은 조심스럽게 잔을 채우는 여급의 손등에 파란 정맥이 돋은 것을 보면서, 기모노 소매 자락이 팔락일 때마다 향기가 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새 광문사 문턱이 자주 닳는 거 같아."
후루쇼가 능숙하게 우리말을 하며 권종성을 돌아보았다.
"아, 예. 1월 4일에 회의를 했습니다. 여덟 분이 모였는데...... 춘당께서도......"
권종성은 서요를 의식하며 어색하게 입을 뗐다. 서요의 부친이 모인 여덟 중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었다.
"아, 괜찮아. 내가 부친을 존경하는 거 알잖아. 후루쇼 상도 다 아시죠, 안 그래요?"
서요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었다. 맨손으로 장사해서 대구 최고의 거부가 된 아버지를 두었다고 해서, 도박이나 사냥질을 일삼는 놈팡이가 아니었다. 서요는 아버지인 서석림과 다르긴 하지만, 성격이 뚜렷했고 자신의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서석림 옹은 훌륭한 분이시죠."
후루쇼도, 서요의 아버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투로 웃어보였다. 후루쇼는 차 한 잔을 마시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덟 명이 모였다고? 이번 취회의 요지는 뭐던가?"
"해가 바뀌어서 신년 인사를 나눌 겸, 금년 계획도 살펴보는 자리였습니다."
권종성은 보고를 할 때마다 추측성의 말투보다 단정적이고 직접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 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혼자였다. 있는 사실만 보고한다고 해도, 어떤 시선으로 그것을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객관적인 보고도 주관이 깔려 있는 것이다. 사실 그날 모임에서 금년 계획을 논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1월 29일에 전체 문회를 개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광제 사장이 도내 각 지역을 대표하는 2백여 명의 회원들에게 '문회소집' 통문을 발송하라고 지시했다. 편지는 김광제가 직접 썼다.
"계획이야 만날 모여서 세우지. 뭐 다른 얘긴 없었어?"
후루쇼가 실망한 표정으로 잇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문명국가도 이루고 외세 침입을 막는 길은 없을까 하는 얘기도 있었죠. 그러니까 일정한 한계를 인정하면서, 양쪽을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균형점이 어딘가? 그런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 균형점에 대해 사람마다 주장하는 게 달라서 나라가 쪼개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그런 말씀을 하시던가?"
서요가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병오 선생입니다."
"음....석재(서병오) 선생도 존경하오."
후루쇼가 어깨를 들썩 올렸다. 석재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시, 글씨, 그림, 가야금, 장기, 바둑, 구변, 의학에 뛰어나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렸다. 다방면의 천재성이 시국에 대한 관찰에서도 발휘되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오른쪽으로 더 가야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왼쪽으로 더 가야 균형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 판단의 차이로 생기는 분열이 현재도 그렇지만 앞으로 조선의 숙명이 될 것이라고 석재가 말했습니다."
"오, 그런가? 그렇다면 서요 상은 어디쯤으로 봅니까?"
후루쇼가 궁금하다는 듯 서요를 빤히 바라보았다. 글쎄요, 서요는 손으로 짧은 머리를 쓸었다. 서요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여급들이 음식이 날라 왔다. 꿩 백숙이 놓였고, 접시에는 꿩 육회가 조금씩 담겼다.
권종성은 자신이 정탐꾼인 사실을 잠시 잊었다. 후루쇼를 만나러 오며 가졌던 긴장감이 막상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어느새 풀어지곤 했다.
그날, 후루쇼를 따라 일경이 관할하는 성안의 감옥에 갔을 때였다.
감옥은 일자형 맞배지붕 기와로 된 곳간 같은 건물이었다. 벽돌조인 대구감옥을 짓기 전이었다. 일인 간수가 두터운 목재 문에 채워진 굵은 자물통을 열었다. 지린내가 풍기는 내부에 십여 명이 목에 칼을 쓰고 앉아, 갑자기 들어온 둘을 주시했다. 후루쇼가 가래 끓은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청송에서 화적질하다 잡혀온 놈들이지." 앞에 있는 산발한 사내가 나무판을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일본을 저주하는 욕설이었다. 후루쇼는 "어차피 내일 큰시장에서 형을 집행할 거야."하더니 권총을 꺼내 사내를 쏘아버렸다. 이마에 총을 맞고 사내가 꼬꾸라졌다. 비좁은 실내였다. 사내가 쓰러지면서 어느 부분이 권종성의 발등을 찍었다. 권종성은 소스라쳤다. 열린 문으로 횃불이 비쳐들었다. 칼 위로 사내들의 얼굴이 공포에 젖은 채 번들거렸다. 낮고 느린 후루쇼의 목소리가 들렸다. "광문사, 광학회, 달성회 등의 조직원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어. 압슬(壓膝), 단설(斷舌), 포락(炮烙), 고형(刳刑), 자자(刺字) 들을 가하면 어떤 저항도 싹이 말라버리지."
후루쇼가 감방을 나와 순사에게 문을 잠그라고 하고 이어 말했다.
"내 말을 잘 듣게. 하지만 도시는 의병이 거병하는 장소가 아니야. 여하히 해서 의병을 만들면 도시는 파괴돼. 총검으로 도시를 제압할 수 있으나 시장은 죽어버리지. 도시는 시장이야. 대구는 무척 큰 시장이지. 죽은 도시에는 시골 사람들도 오지 않고, 일인들도 모여들지 않아. 시장이 죽었으니까."
후루쇼가 총을 가슴에 넣으며 덧붙였다.
"지난해 경성에서 한인 상인들이 어음으로 돈놀이를 했어. 일본 경찰에서 단속 하자 종로상인들이 모두 철시를 했지. 삽시간에 경성이 죽음의 도시처럼 변해버렸어. 광무 황제폐하와 일본 경시청까지 나서서 가까스로 수습한 거야. 그렇다네. 총으로는 의병이나 화적을 떼려 잡을 수야 있지만, 상인들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돈 1전도 꺼내게 할 수가 없네."
후루쇼의 말은 광문사나 수창사 달성회 회원들에게는 어떤 위해도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시장이 닫히니까. 시장이 닫히면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오지 않으니까. 권종성이 광문사를 정탐해서 보고한다고 해도 그 정보는 단순히 일본 경찰에 비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