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동네 으뜸 의사] 손창용 부강외과 원장

"웃는 얼굴에 행복…나는야, 환자 짝사랑하는 의사"

손창용은 1966년 경주 출생. 경북고
손창용은 1966년 경주 출생. 경북고'계명대 의과대 졸업. 외과 전문의. 부강외과 원장. 전 계명대 경주동산병원 임상교수. 계명대 동산병원 외래교수. 대구시의사회 부회장. 경주시장 표창(1999년)

담당 교수 대신해 亞혈관학회 참석

예상질문 100개 외워 답변 박수갈채

강연 성공적으로 마치며 진로 정해

개원하고 1년 동안 생활비도 못줘

지난해 하루 내원 환자 100명 눈물

이젠 남편으로 아픈 아내 지키고파

오후 6시 30분, 진료 시간이 끝났는데도 손창용(51) 부강외과 원장이 수술실로 향했다. 손가락을 깊게 베인 환자가 봉합수술을 받으려고 1시간 가까이 기다리고 있는 탓이었다. 15분 만에 능숙하게 봉합한 손 원장이 "아픈데 기다리느라 욕봤지요? 워낙 바빠 그러니 이해해달라"며 미안해했다.

손 원장의 수술실에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손 원장은 "외과의사의 가장 좋은 점은 음악을 들으며 일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진료 대기실 책장에는 2천여 권의 책이 꽂혀 있었다. "개원하고 2, 3년간은 환자 수가 하루에 10명도 안 되는 날이 많았어요. 이게 다 그때 읽은 책이에요." 죽기 전까지 책 1만 권을 읽는 게 목표라는 손 원장의 곁에는 읽다 접어둔 책이 대여섯 권 쌓여 있었다. 병원 곳곳에는 환자들에게 받은 편지를 모은 액자들이 걸려 있다. "환자들이 웃는 얼굴로 진료실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정말 행복해요. 오죽하면 아내가 나한테 '환자를 짝사랑하는 의사'라고 할까요. 짝사랑이면 어때요? 허허."

◆순탄치 않은 교수, 개원의의 삶

손 원장을 혈관외과로 이끈 건 우연한 계기였다. 당시 전공의로 유일하게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혈관학회'(1994년)에 강연자로 참석했던 것. "교수님을 도와 '심부정맥 혈전증'을 주제로 논문을 썼는데, 교수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제가 발표하게 된 거예요. 질의응답에 대비해 예상 질문 100개를 뽑아서 달달 외웠는데 그중 2개가 적중했고, 완벽하게 대답했죠. 대구에서 온 햇병아리가 전 세계 석학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박수갈채를 받았어요." 그는 뒤풀이 자리에서 "선배님들을 따라 혈관 분야에 이 한 몸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전공의 시절 수술실에서 살다시피 한 그는 실명 위기도 넘겼다. 수술 중 한쪽 눈의 시야가 커튼을 친 듯 흐려졌다. 망막박리증이었다. 서둘러 수술한 덕분에 회복됐고, 군 입대가 면제됐다. 군 복무기간 3년을 덤으로 얻은 그는 1997년부터 5년간 계명대 경주동산병원에서 임상교수를 지냈다. "외과과장 겸 응급실장을 맡아 복막염과 충수염, 탈장, 치질 가릴 것 없이 수술했고 이식수술도 맡았어요. 혈관 분야 전문의로 경주에서 처음으로 정맥류 수술도 했죠. 지역 의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99년에는 경주시장 표창도 받았어요."

하지만 대구 본원으로 돌아오진 못했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 파업 사태 당시 전공의 편을 들었다가 눈 밖에 난 탓이다.

교수직을 던진 그는 후배와 함께 혈관 및 화상 분야를 치료하는 외과병원을 개원했다. 환자가 좀처럼 늘지 않았지만 외과 진료를 고집하며 버텼다. "개원하고 1년 동안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주지 못했고, 아내가 곗돈을 타서 생활했어요. 화상 치료로 조금씩 유명해지면서 2년 만에 뭉칫돈을 줬더니 펑펑 울더군요." 그러나 얼마 후 함께 개원했던 후배와 헤어졌고, 외과전문병원의 꿈도 접었다.

◆이제라도 아픈 아내 곁 지키고파

손 원장은 "대구에서 화상 치료로 유명한 병원장들이 모두 제자이자 후배"라고 했다. 1998년 국내 최초로 화상 치료에 습윤밴드(하이드로콜로이드제)를 적용한 것도 그였다.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들은 환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하지정맥류 등 혈관 질환 환자도 두 달 뒤까지 수술 예약이 꽉 찼다. "작년에야 하루 내원 환자 100명을 찍었어요. 정말 감격스러웠죠. 외과 개원의는 하루 평균 환자가 20명이면 성공이라고 하거든요. 환자들이 진료를 받으려고 1시간씩 기다려주니 감사할 따름이죠."

병원 운영이 안정되면서 외부 활동도 바빠졌다. 평소 책을 가까이하고 글솜씨가 좋은 그는 2009~2011년 대구시의사회 공보이사를 맡아 의료계 현안을 글로 쓰고 칼럼을 게재했다. 이후에는 기획이사를 맡아 보여주기식 행사를 없애고 실질적으로 지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진료봉사도 기획했다. 달서구 청각장애인센터에서 두 달에 한 차례씩 진료봉사를 했고, 이동식 초음파 장비로 검사도 제공했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2년 전 부인이 임파선암 진단을 받았다. 부인은 6개월간 항암화학요법을 받았고, 지난해 간염으로 생사의 고비도 넘겼다. "위독했던 아내가 딱 한마디 하더군요. '내 인생 단 하나의 후회는 당신과 추억이 너무 없다는 것'이라고요. 제가 너무 바빴던 거예요. 병원이 안정되기 전까진 여행가지 않겠다고 여권도 찢어버렸거든요. 아내와 여행으로 가장 멀리 가 본 곳이 제주도예요."

그는 대구시의사회 부회장 임기가 끝나는 내년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편'으로만 살 생각이다. "아내와 함께 여행도 가고 아내 병구완으로 고생한 장모님과 태극권도 배울 생각입니다. 병원은 물론 변함없이 지키겠죠."

사진 김영진 기자 kyjmaei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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