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그녀를 보았다는 사실을 애란은 알고 있을까?
임계승이 기차 정거장 옆에 있는 마쓰하코 상점에서 석유를 사서 들고 오던 길이었다. 북문에서 남문으로 이어지는 길과 관풍루에서 달서문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사거리에서 인력거 하나가 빠르게 지나갔다. 눈이 펑펑 쏟아져 온통 하얗게 보이는 기와집들과 거리에서 조그마한 인력거가 미끄러지지도 않고 다람쥐처럼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길에 나와 있는 아이들과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력거꾼은 멋진 운행 솜씨를 과시했다. 아마 눈(目)이 속이지 않았다면, 소형 수레의 작은 지붕 밑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바로 애란이었다.
그녀는 한 순간에 도시 곳곳에서 출현했다. 수창사 낮은 담장 위에서, 어느 날 신문을 사러 광문사로 온 구독자들 틈에서 그녀가 보였다. 그런 현상은 대구에 오기 전에도 있었다. 청도 성현 터널 공사장에서 컴컴한 동굴에 누워 있을 때 문득 그녀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홀로 밤길을 걸으며 별을 헤아릴 때, 인부들이 숙소로 돌아간 후 황량하던 초량의 바다 매립 공사장에서도 그녀가 나타나는 마법 같은 순간이 있었다. 그래서 폭설이 쏟아지는 꿈결 같은 거리에서 인력거 지붕 밑에 앉아 있는 애란을 보자, 실체가 아니라 흡사 초량 왜관 앞 잡화점에서 사려고 집어 들었던 조그만 손거울에 비쳤던 그녀가 떠오르는 것이다.
인력거를 타고 있던 그녀는 환각이 아닌 게 분명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노랗고 붉은 저고리와 자색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승은 그녀가 기생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금릉이라는 기명을 가진 것도. 장상만이 그녀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광문사 직원인 권종성도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지난 주에 광문사에 신문을 사려 왔을 때 여염집 규수인 양 무명 장옷을 목까지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애란은 계승이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계승은 그녀를 태운 인력거가 서문 방향으로 꼬리를 감춘 뒤에도 한참동안 인력거가 남긴 궤적을 바라보았다. 폭설이 두 가닥 깊은 줄을 지울 때까지. 계승은 석유통을 들고 서서, 자신이 기생 옷을 입을 그녀를 보았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지나갔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돌아서면 이런 궁금함은 사그라지고 말거다. 그런 생각은 너무나 여리고 감정적이다. 도시는 지금 거대한 불아궁이와 같았다. 어느 한쪽에서 일촉즉발의 위험이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이었다. 계승은 작은 피리를 품에 넣고 곱사등이 오돌매를 만났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었다. 달서교를 지나 큰장에 들어설 때 한 걸음 뒤에서 어기적어기적 걷던 오돌매가 계승의 혼몽한 감정을 일깨웠다.
"눈이 그치지 않아 불을 놓지 못하겠어."
"......."
"이와세가 운이 좋군."
1월 11일에 이와세 상점에 불을 찌르려던 계획이 자꾸 연기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준비가 덜 된 까닭이었고, 기회가 되자 폭설이 쏟아졌다. 계승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그것만은 결행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성곽을 무너뜨린 죄책감 때문만 아니었다. 일인 상인들이 곧 남은 성곽을 모두 무너뜨릴 거라는 정보가 그를 사로잡았다. 지난 해 북쪽 성곽을 허문 뒤 대한제국 정부는 책임을 물어 박중양 관찰사 서리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막아주었을 뿐더러 크게 칭찬했다는 것이다. "야마모토(박중양)가 과감하고 기막힌 일은 저질렀군. 도심에 있는 성을 없애야 일본인과 한국인이 물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어울리지." 지방 도시의 성곽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서 축조된 것이라 성곽 자체가 반일 감정을 일으키지 않느냐는 것이다. 일인 상인들이 장삿길을 넓히려고 성곽을 허문 것이고 박중양이 허락한 것이지만, 그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이는 이토 총독이었다. 앞으로 전국 각처에 있는 읍성들을 다 헐지 않을까.
계승이 오돌매를 따라 간 곳은 큰시장 안쪽, 달성토성 방향에 있는 초가였다. 닷새 만에 서는 장이지만 폭설로 큰 시장은 한산했다. 일찌감치 상인들이 짐을 챙긴 썰렁한 시장 안, 계승과 오돌매는 주변을 살핀 후에 마구간을 갖춘 초가로 들어갔다. 우시장 주변에는 이 집과 유사한 초가가 많이 있었다. 장상만과 몇몇 달성회 회원들이 손을 들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마구간 아래에 구덩이를 파서 서넛 사람이 숨을 수 있는 방을 만들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은닉처 입구를 감쪽같이 마구간 바닥으로 덮고 노새들을 묶어 놓으면 누군들 알아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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