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實在)하지 않음에도 실재처럼 기능하는 것들이 있다. 화폐나 종교, 스포츠 경기의 규칙이 그런 것에 해당한다.
우리가 5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씹어 먹는다고 허기를 면할 수는 없다. 지폐 한 장을 태워 그 온기로 추위를 피하거나 지폐 다발을 타고 해외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폐로 배를 채우고, 몸을 따뜻하게 하고, 해외여행을 즐길 수 있다. 5만원짜리 지폐로 쌀과 반찬거리, 땔감을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폐가 다른 실재와 교환 가능한 것은 상대와 내가 화폐의 효용을 물질과 비례해 인정하기 때문이다. 교리나 스포츠 규칙 역시 그 자체로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지만, 사람들이 그 가치를 믿고 복종하기에 실재로서 의미를 지닌다. 실재 없는 것이 실재로서 가치를 지니느냐, 지니지 못하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상호 인정'이다. 내가 내민 지폐의 가치를 상대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폐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문재인정부는 북한과 대화, 경제 협력, 인도적 지원 등을 통해 북한 핵을 폐기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사드 문제 역시 중국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통령 선거 당시 문재인 후보가 사드 문제는 다음 정부에 맡기라고 주장했던 것, 사드를 놓고 중국의 경제 보복이 이어지자 사드 문제를 해결할 복안이 있다고 말했던 것, 대통령이 된 후에도 환경영향평가, 국회 동의 등을 이유로 사드포대 배치를 미루는 것도 대화와 모종의 거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등에 대통령 특사를 파견했다. 특사들은 제각각 북핵, 사드, 위안부 문제 등 난제를 안고 각국으로 달려갔다. 특사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장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뭔가 '비장의 카드'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특사들은 각국의 냉정한 입장만 확인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문 대통령은 미국, 중국,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특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다들 아주 큰일들을 하셨다. 아주 성과가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주 큰일들, 아주 성과가 많았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대통령 특사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내놓을 카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 중 하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투자할 줄 안다'는 점이다. 덕분에 제자리를 맴도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사람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당장 북핵, 사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성과로 이어지려면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문재인정부의 '노력'을 상대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호 인정'하지 않을 경우 5만원짜리 화폐가 종이 쪼가리로 전락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뿐이다.
우리가 갖은 노력을 다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까? 우리 처지를 자세히 설명하면 중국은 우리의 사드 배치에 동의할까? 아닐 것이다. 다른 쪽은 어떨까? 사드를 철거해도 미국은 우리의 굳건한 동맹으로 남을까? 한미 동맹이 깨져도 중국이 우리를 지금만큼 대접할까? 사드 철거와 함께 우리를 위협하는 중국과 북한의 핵미사일도 철거되는 것일까?
매사를 일도양단식으로 결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북핵과 사드 문제에 관해서라면 답은 '모' 아니면 '도'다. 한미와 북중을 모두 만족시키는 묘수는 없다.
그럼에도 문재인정부는 결론을 미루고 있다. 이는 결국 국익 훼손(미국의 불신, 중국의 기대 상승, 북한의 핵 완성 등)으로 이어질 뿐이다. 힘들겠지만 문재인정부는 사드를 신속히 배치하고 그에 따른 피해를 극복해나갈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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