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온 사람들.
남쪽으로 망망한 바다를 끼고, 길게 늘어진 자갈밭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모난 곳 없이 매끈한 돌들이 수십 리 포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물이 밀려왔다 쓸려갈 때는 요상하게 좋은 소리가 났다. 수십 번을 들어도 좋은 소리였다. 자갈밭 한구석이 왁자하였다. 저포를 지나 큰 고개를 두 번 넘어 도착한 장작지였다.
"울릉도로 나는 간다, 울릉도를 가서 보면,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에 가득 찼네…이 돈 벌어 뭐할거나, 늙은 부모 봉양하고 어린 자석 길러내서, 먹고 쓰고 남은 놈은, 부귀영화로 살아보세."
뙤약볕 아래 누구는 노래를 하고 누구는 어깨춤을 추었다. 몇은 새끼를 꼬는 듯하고, 몇은 나무를 쪼고 다듬는 듯도 했다. 상의를 벗어 던진 몇은 바다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미역과 전복, 어육이 꾸덕꾸덕 말라가고 있었다. 검찰사 일행을 본 사내들이 재바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고 나리, 소인은 전라도 흥양 초도에서 배를 맹글러 온 김내언이라 하여라."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초도라면 수천 리 물길인데 어찌 이 멀리까지 왔느냐?"
"나리, 초도에는 배를 만들 큰 나무가 없어라. 섬놈이 배 없이 뭣으로 먹고 산당가요. 해마다 춘삼월이면 동남풍이 부는디 흥양 사내들은 그 바람을 타고 울릉도로 향하지라. 여기까지 보름, 많게는 한 달도 더 걸리지라."
"위험하지는 않느냐?"
"오다가다 풍랑을 만나 떼죽음당하는 자들도 간혹 있긴 헌디, 소인 배 맹그는 부친 밑에서 대갈빡에 피도 안 말랐을 때부터 이 섬을 드나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길이 훤하여라. 단지 워낙 긴 항해라 잠을 거의 못 자는 것이 젤로 힘들지라. 볶은 콩을 밤낮으로 씹어가며 잠을 쫓는 수밖에요. 그렇게 섬에 당도하면 온 여름내 배를 맹글고, 쪼까 조용한 날엔 전복, 미역도 따고 있습죠. 와따, 여그가 물이 좋아 그런감, 고것들도 육지에선 없어 못 팔만큼 최상으로 금이 쳐진 당게요. 가을께나 바람이 좀 선선해진다 싶으면 북서풍이 부는디 고것을 타고 섬을 떠나지라."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식솔이 모두 몇인가?"
"자식 일곱에 노모, 마누라까지 모두 열 목숨이여라."
엎드린 그의 손이 거칠고 둔탁했다. 방방곡곡을 떠돌며 조선의 나무로 조선의 배를 만들었을 조선의 손이었다. 손톱이 깨지고 아물고, 그러면서 마디가 굵어지고 손끝은 무쇠같이 굳어졌을 것이었다고 규원은 생각했다.
"배를 만드는 데 주로 무슨 나무를 쓰느냐?"
"솔송나무, 수구나무(삼나무)를 주로 쓰지라. 요것들이 육질이 단단한지라…. 판때기와 판때기를 이어주는 나무못과 용골은 소나무나 참나무를 쓰고 있어라. 느티나무, 노간주나무로는 집도 짓고, 홍두깨, 다듬잇돌, 절구통을 맹그는데 수백 년이 가도 변함이 없습죠."
이익을 좇아서 몰래 섬에 들어온 자들은 모두 가난하고 악착같은 사람들이었다. 전라도 해민들은 겨우 미역과 전복을 따거나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었고, 몇몇은 약초를 캐는 것이 전부였다. 엎드린 자 중에 앳된 손이 보였다. 김내언의 격졸 중 한 사내의 아들로 나이를 물으니 겨우 열한 살이라 했다. 규원은 더 이상 엎드린 자들의 손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울창한 숲을 훑었다.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엄습했다.
"보시게 김내언, 만약 이 땅을 개척한다면 따르겠는가?"
"나리, 따를 뿐이당가요. 소인 식솔 모두 데불고 기꺼이 오겠어라. 흥양은 토질이 나빠 농사도 어렵당게요."
쪼개 놓은 나무의 야무진 속살이 자갈밭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흥양 사람들, 그들이 만드는 배는 예스럽고 소박하였다. 새까맣게 그을린 그들의 얼굴과 그들이 만드는 배가 서로 닮았다고 규원은 생각했다. 비천한 듯 비천하지 않았고 불우한 듯 불우하지 않았다. 열댓 명 사내들이 하나같이 낄낄거리면서도 바삐 몸을 놀리며 게으름을 피우는 자가 없었다. 아직 축조되지 않은 배는 텅 비어 있었으나 몇 달 뒤 초도로 돌아가는 그들의 배는 만선으로 가득할 것이다.
박시윤 작가
◆울릉도 조사 후 검찰일기 남겨
이규원은 울릉도를 다녀간 뒤 '울릉도 검찰일기'를 남겼다. 검찰에 앞서 이규원은 1882년 4월 7일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3일 뒤인 10일 서울을 출발했다. 같은 달 30일 울릉도에 도착한 이규원은 11박 12일 동안 육로와 해로로 섬을 둘러본 뒤 서울로 돌아와 6월 5일 고종에게 복명했다. 이 2개월간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검찰일기엔 하루 일과를 기록한 일기 부분과 고종에게 보고하기 위해 일기를 토대로 작성한 계초본, 검찰 이후 고종에게 보고하며 나눈 대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계초본은 검찰 이후 상경하며 5월 27일 도성 인근에 다다를 즈음 일행과 헤어진 뒤 두모포(서울 성동구 동호대교 북단) 인근 한 사찰에서 썼다.
5일 오전 저동을 나선 검찰사 일행의 이날 행적은 일기와 계초본에 서로 다르게 기록돼 있다.
이날 오후 일행이 도착한 장작지는 울릉읍 사동이다. 저동과 도동, 사동은 각각 고개 하나씩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저동을 출발한 일행이 사동에 이르기 위해선 도동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일기엔 일행이 도동 포구로 내려서지 않고 곧장 사동으로 넘어간 것으로 돼 있다. 반면 계초본엔 도동 포구에서 일본인을 만나 필담을 나눈 뒤 배를 타고 사동 해안에 다다랐다고 적혀 있다. 일기에선 육로 검찰을 모두 마친 뒤 배를 타고 바닷길로 섬을 한 바퀴 도는 과정에서 도동 포구에 상륙해 일본인을 만난 것으로 돼 있다.
이에 대해 이혜은 동국대 교수는 "계초본이 공식적인 보고서란 점에서 5일 일본인을 만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 기사는 일기 속 여정을 따르기로 했다. 작성한 시점이 일기가 앞서고, 이규원의 행적과 울릉도의 지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
◆백성들의 오랜 삶의 터전
사동은 울릉도 동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길이 4㎞의 길고 오목하게 펼쳐진 해안을 따라 가장 동쪽부터 사동1리, 2리, 3리 마을이 이어진다. 검찰사가 쓴 일기와 지형으로 미뤄 보면 일행은 지금의 사동1리 어딘가에서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이규원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포구에 이르렀는데 이름이 장작지(長斫支)로, 포변의 10리가량이 모나지 않는 돌로 덮여 있었으며 길은 희미하였다. 마침 전라도 흥양 초도에 사는 김내언이라는 자가 격졸 12명을 데리고 움막을 짓고 배를 만들고 있어서 바로 움막에 들어가 묵었다.'
이날도 검찰사 일행은 포구에서 조선인을 만났다. 일행이 울릉도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각 포구나 숙영지엔 늘 조선인이 있었다. 울릉도 도착 6일째인 이날까지 검찰사가 직접 만난 조선인은 93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배를 짓거나 미역을 땄고, 성인봉 주변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캤다.
이보다 100년 전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국립해양박물관이 번역해 출간한 '라페루즈의 세계 일주 항해기'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87년 5월 29일의 기록이다.
'조선 해안에서 약 20리 외 정도 떨어진 섬이었다.…그곳에서 우리는 중국 선박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의 배를 건조하는 작업장을 발견했다. 일하던 사람들은 단거리 포의 사정거리까지 접근한 우리 함선을 보고 놀랐는지 숲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들은 육지에 사는 조선 목수로 여름이면 섬에 식량을 가지고 와서 배를 건조한 후 본토에 가져가 판매하는 것 같았다.…섬의 서단을 지났을 때 섬에 가려 우리 함선이 오는 것을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작업장의 일꾼들이 나뭇조각을 옆에 두고 배를 짓다가 우리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처럼 울릉도는 수토정책하에서도 백성들의 오랜 삶의 터전이었다. 일례로 이규원이 울릉도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나리동을 거처 저동에 이르기까지 최소 4일간 산행을 함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서일은 울릉도에 들어온 지 10년이 된 인물이었다. 당시 울릉도에 이미 많은 지명이 정착돼 있었고, 섬 곳곳에 산신당이 있었던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김호동 전 영남대 독도연구소 연구교수는 "검찰사가 만난 이들을 일시적 거류자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울릉도'독도 근해를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찾았던 울릉 거민(居民)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울릉도 역사 '술비소리'에 고스란히
이규원은 울릉도에 머문 12일 동안 조선인 129명을 만났다. 이 가운데 전라도 출신은 103명, 전체의 80% 수준이다. 이날 사동에서 만난 김내언 일행도 지금의 전남 여수시 초도 출신이다. 당시 섬에 있던 전라도 사람들은 초도를 비롯해 흥양(고흥), 삼도(거문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주로 배를 짓거나 미역을 땄다.
이규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 지어졌을 '장작지포'란 사동의 옛 이름도 전라도 말에서 유래했다. 장작지포는 자갈밭이 길게 펼쳐진 포구란 의미다. '작지'는 전라도에서 자갈밭으로 통한다. 여수 삼산면지(誌) 등을 보면 '노랑빠구 짝지' '큰짝지' '진짝지' 등 거문도와 초도 곳곳의 옛 지명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북면 현포마을의 이름도 '흑작지'였다. '거문작지' '가문작지'로도 불렸다. 검은 자갈로 이뤄진 해변이라는 의미다. 현포란 이름은 검다는 의미의 현(玄) 자를 쓴 한자식 이름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거문도와 초도에는 울릉도 나무로 지은 집이 몇 채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충석 전 여수시장도 한 TV 프로그램에서 "초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울릉도 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았다"고 증언했다.
집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이곳엔 울릉도와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다. 울릉도'독도를 오간 전라도 주민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여수 일대를 여러 차례 답사한 김윤배(47)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선임기술원은 2011년 거문도 일대에서 노간주나무로 만든 홍두깨, 다듬이 등 오래전 울릉도 나무로 만든 여러 가재도구를 확인했다. 김 기술원은 "거문도에선 매년 음력 4월 15일 풍어제가 열리는데 선대들이 풍어제를 올리고 울릉도로 향하던 시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울릉도행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집을 짓고 배를 만들기 위해선 목재가 필수적이었으나, 전라도에선 벌목이 금지돼 있었고 거문도 일대는 큰 나무가 잘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결국 그들은 울창한 숲과 해산물이 풍부한 울릉도를 찾게 됐고 대대로 항해를 이어왔던 것이다.
거문도 어민들에게 울릉도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 희망은 보름에서 한 달에 달하는 길고도 위험한 항해를 견디는 힘이 됐고, 거문도 뱃노래 '술비소리'에 고스란히 담겼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울릉도로 나는 간다/ …울릉도를 가서 보면/ 좋은 나무 탐진 미역/ 구석구석 가득 찼네/ 울고 간다 울릉도야/ …이 돈 벌어 뭐할 거나/ 늙은 부모 봉양하고/ 어린 자석 길러내서/ 먹고 쓰고 남은 돈은/ 부귀영화로 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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